석포마을| 대연동
석포(石浦)마을은 현재의 대연 4동에 있었던 마을이다.
1740년에 간행된 『동래부지』에 의하면 남촌의 관내에 있는 석포리로서 관문에서 27리 거리에 있었다.
석포란 마을 이름은 이 곳의 등하천에 돌자갈이 많아 ‘돌개’라고 불렀는데 한자로 돌을 가리키는 석(石)과 포구를 의미하는 포(浦)를 합하여 ‘석포’라고 불렀다. 옛날 석포 마을은 천제등(天際燈:부산공고 뒷산 일대)과 전선등(戰船燈:부산외국어대학교 뒤산 일대)사이에 있었던 한적한 포구였다.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폐어선의 잔해가 수상교(水上橋:동국제강입구에 있는 다리) 부근에 산재해 있었다고 한다. 1950년대에도 비사등(飛蛇燈:부산시립박물관 근처)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였으며 등하천에 선착장이 있어서 어선이 왕래했다고 한다.
석포마을의 입향조는 470여 년 전 동래성 수문장을 하던 정복덕 씨의 아들인 정춘세 씨이다. 현재 동래 정씨 재실인 석산재에는 정복덕씨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자손도 번성하여 석포마을에만 206세대 800여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석산재 옆의 솔밭에서는 옛날에 활을 쏘았다는 터가 지금도 소나무 몇 그루와 함께 남아 있다. 또 이곳은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보면 석포목장이 있었다. 현 남부면허시험장이 있는 곳까지 목마성을 쌓아서 말들을 방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동여지도』에도 ‘석포목장’이라는 지명이 있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