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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뭍과 신선대| 용당동

맹뭍과 신선대

맹뭍은 신선대 해안 일대를 가르키는 말이 다. 어원은 물 흐름이 빠른 곳에서 나왔다. 작은 풍랑에도 맹뭍 끝에서 고래 도랑까지 세찬 물살이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다다목도 맹뭍의 세찬 물살에 산자락이 깎이면서 남은 돌무더기의 퇴적이다. 맹뭍은 해방 전까지 ‘맹뭍 비알(비탈)에 나무하러 간다’ ‘맹뭍에 물에끼 하러간다.’ 등 용당 사람들이 많이 쓰던 말이다. 맹뭍은 용당 사람들의 일터였고 활동 무대였다.


맹뭍 끝에서 고래 도랑까지는 약 600m였고 암석과 자갈밭으로 이어졌다. 그 가운데 지점에 검역소와 방파제 두개가 자리잡고 있다.

1939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방파제 공사가 완공되면서 물 흐름이 차단되어 웬만한 풍랑에도 호수처럼 잔물결만 이는 순한 물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맹뭍이라는 지명은 생명력을 잃기 시작하였으며 〈신선대〉라는 지명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용마산의 남쪽 봉우리인 신선대는 해운대, 자성대, 오륜대, 태종대, 강선대, 몰운대, 영가대(永嘉臺 : 지금은 없어짐)와 함께 부산의 8대에 속했으며, 해운대, 이기대, 태종대, 몰운대와 함께 부산의 5대라 불리고 있다.


신선대는 1972년 6월26일 ‘부산광역시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남구 용당동 산 185번지 면적 33,100㎡로 황령산에서 뻗어 나온 산등성이가 부산만에 몰입하여 형성된 우암 반도의 남단에 해당되며 이곳 화강 암질로 된 해안이 파도의 침식을 받아 발달된 해식동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부두의 동쪽 바닷가 절벽과 산정을 총칭하여 말한다.

신선대 주변의 산세는 못을 둘러싼 용의 형상과 같다고 하여 이 일대를 용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산봉우리에 있는 무제등이란 큰 바위에는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백마의 발자취가 있다 하여 신선대란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신선대의 현 위치는 흔히 〈뻘기이 고개〉를 분할 점으로 하여 그 남쪽 산맥을 신선대라고 한다. 80년대 말 극동정유에서 용호동의 백운포 앞 바다를 수만 평 매립하여 연탄 단지를 조성하려 했을 때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신선대라는 이름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신선대의 정확한 위치는 검역소가 자리했던 백사청송의 해안 일대와 망 너머 고개를 분할 점으로 한 남쪽 일대의 산줄기와 산자락을 포괄한다는 것이 옛 어른의 생각이었다. 용당의 주산인 보오지산의 왼쪽 날개처럼 뻗어서 마을을 감싸 안고 거센 물결과 세찬 바람을 막아 주는 신선대는 용당의 지보임에 틀림없다.

요즈음 옛 검역소 지역과 맹뭍 비알(비탈)이 깎여 나가서 신선대 부두에 매립되어 버리고 현재는 꼭대기 부분만 신선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신라 때 대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 선생이 신선대의 경관을 즐기면서 바위에 신선대라는 진필각자(眞筆刻字)를 남겼다고 전해 오는데 오랜 세월의 풍상 속에 마멸되어 그 흔적을 알 수없다.


옛날 신선들이 신선대에서 주연을 베풀 때면 풍악 소리가 마을까지 들려왔다고 한다. 신선이 즐겨 마시는 술은 유하주(流霞酒)로 한 잔 얻어 마셨더니 십년 동안 목마르지도 배고프지도 않았으며 세월이 가는 줄도 몰랐다는 이야기가 중국의 고사에 나온다.

신선대의 동쪽 해상에는 자그마한 탕건 바위가 있었다. 옷자락을 바람에 날리면서 용마산에서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던 신선의 머리에 얹혀져 있던 탕건이 벗겨져 내려 앉아 돌덩이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유명한 지사 (地師)였던 최선학의 무덤이 망 너머 고개 남쪽 절벽 위에 있었다. 최선학은 유언하기를 자신의 시신을 망 너머 고개 남쪽 서말도에 수장하라고 하였다. 수장이 불가능할 때는 서말도 위쪽에 매장을 하되 대마도가 보여서는 안 되니 30장(丈) 높이의 둑을 쌓아서 남쪽 바다를 가려지게 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의 시신을 운구해 온 자속들이 앞을 바라보니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졌고 만장의 석벽 아래 펼쳐진 서말도의 만을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났다고 한다. 유언을 지키기에는 주변 환경이 너무나 열악하여 논의 끝에 대마도가 보이는 서말도 위쪽에 매장을 했다. 30장 높이의 둑을 쌓을 수가 없어서 30장 길이의 둑을 쌓았다. 그러자 잠시 후 서말도의 바닷물이 격랑을 일으키면서 한 틀의 꽃상여가 떠올라 최선학의 시신을 받아 안으려 하였으나 매장 후인지라 그냥 내려갔다고 하며 이 후 최선학의 가계에는 대가 끊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최선학의 묘에 새해 첫 벌초를 하면 좋은 배필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말이 퍼지면서 혼기를 앞둔 용당의 처녀 총각과 나무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벌초를 하는 바람에 최선학의 묘는 언제나 기계로 밀어 놓은 머리처럼 풀이 제대로 자랄 겨를이 없었다.


신선대에 검역소가 설치된 이후 일본인들이 최선학의 묘를 발굴했을 때 묘안에는 흙만 쌓였을 뿐 유골은 물론 옹기그릇 하나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가묘(假墓)로 결론지었다고 한다. 광복된 후 몇 년이 지나 그의 묘를 찾아가니 여느 묘와 다름없이 봉분이 낮아졌으며 발길이 많이 밟힌 듯 봉분 위에는 풀이 없고 흙만 반질했다. 지금 무덤과 비석은 없어지고 20장 길이의 둑만 남아 있는데 그 곳에는 비두가 하나 있었다.


신선대에는 희귀목인 보리수나무가 자생했다. 보리밥 나무의 열매가 익는 7월경이면 나무꾼들이 옛날 신선의 감흥에 젖어 알이 크고 단 열매의 맛을 즐겼다고 한다. 보리밥 나무에는 터줏대감 격의 독사가 있어 나무꾼들을 공격하여 “보리밥 따 먹다가 뱀에게 쫓기면 직진하지 말고 지그재그로 도망하라”는 수칙이 있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검역소 시대는 막을 내리고 검역소 건물과 방파제가 남아 있던 중 6ㆍ25사변으로 피난민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1ㆍ4후퇴 때 북한에서 내려 온 피난민들이 주축이 되어 20여 년간 신선대는 이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이들은 주민들과 공존 관계를 유지하면서 용당동 4통 주민으로 60년대 초까지 살았다.

1950년 초부터 3-4년간 신선대와 대교동 사이에 여객선이 운항되었으며 이용객도 많았다. 신선대를 관광지로 개발하여 외부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씨름 대회, 그네 타기 대회 등이 열렸고 솔밭 속에는 다양한 놀이 시설이 들어섰다. 신선이 학을 타고 신선대에 내려 왔다는 말이 퍼진 것도 이 무렵이다. 신선대 해변에는 판자로 지은 술집이 늘어섰고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었다. 해수욕 철이 되면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불〉에 있던 〈회까리막〉에는 탁구장이 들어섰다.

이처럼 사람들이 붐비던 신선대도 휴전 이후 피난민들이 12열차를 타고 떠나면서 한산해졌다. 그러자 이곳에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북쪽 피난민들만이 눌러 살았다. 1950년 초부터 1959년까지 육군병참학교가 신선대 입구의 들판에 20여 동의 막사를 짓고 있었다.

1959년 사라호 태풍 때에 방파제에 띄어 둔 원목의 충돌로 방파제의 일부가 유실되었다. 1960년도에 남구 감만동에 개원하여 운영 중이던 형제 보육원(兄弟保育院)을 박인근(朴仁根)씨가 신선대의 송림 속으로 옮겨와 462평의 건물을 짓고 형제 보육원의 신선대 시대를 열었다. 1965년 7월 부산시로부터 아동복지시설인가를 받았고 1971년에는 부랑아 보호시설로 바꾸어 운영해 오다가 1970년대 중반 주례 뒷산으로 옮겨감으로써 형제 보육원의 신선대 시대는 막을 내렸다.


부산항 3단계 개발 사업인 〈신선대 부두〉가 1991년 6월 26일 준공되어 개장되었다. 컨테이너 전용부두로 2,704억 원의 엄청난 공사비가 투입되었다. 〈신선대 부두〉는 동명목재 부지 일부와 앞 바다를 매립한 27만 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조도 방파제〉700m와〈오륙도 방파제〉 1,004m, 호안(護岸) 900m의 외곽 공사를 바탕으로 높이 40m가 넘는 고속형 〈수퍼사이즈 크레인〉6대와 컨테이너를 쌓는 〈트렌스퍼 크레인〉25대, 기타 이동식 장비를 갖추고 있으며 야간작업 때 사용되는 〈라이팅 타워(Lighting Tower)〉19개가 설치되어 있다. 이 부두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를 최대 140만 개 이상 처리 할 수 있는 대형 부두인 것이다.


〈신선대〉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울창한 수풀과, 눈부신 백사장, 매끄러운 자갈 밭, 병풍처럼 늘어선 기암절벽의 빼어난 경관으로 부산의 명소로 손색이 없었다. 이러한 신선대의 훼손은 6ㆍ25때 몰려온 피난민에 의해 검역소 건물이 점거되고 판잣집이 늘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사라호 태풍 후 동명목재가 용당에 들어와서 개발에 착수하면서 산기슭이 깎이고 길이 뚫리고 〈불〉과〈다다목〉 등 많은 명소가 사라졌다. 1987년 4월 25일 컨테이너 전용 부두 3단계 공사가 착공되면서 용당 해안과 신선대는 옛 모습을 영원히 잃고 말았다.


장일수 씨의 말에 의하면 옛날 신선대는 바다에 접한 모래사장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그 모래도 금사로서 현 신선대 부두 일대가 해수욕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산봉우리만 신선대로 명명되어 볼품없게 되어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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