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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래둑)| 용당동

<불>은 본동의 동편 인가가 끝나는 곳에서부터 동쪽의 고래 도랑이 있는 곡각점까지 바다를 안고 길게 누워 있던 모래둑의 이름이었다. 너비는 40m내지 50m였고 길이는 200m쯤 되었으며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은 서고동저형(西高東低形)으로 고래 도랑으로 가면서 차츰 낮아졌다. <불>에는 올이 굵고 싱싱한 해변 잔디가 그물처럼 곱게 덮여서 잔디를 입힌 야구장처럼 파릇파릇했다. <불>은 아름다운 자연 모래둑으로 고래 들판이 밭으로 개간되기 전에는 더욱 장관이었다고 한다.


<불>이라는 지명은 오래 전부터 불려왔다. 용당 사람들은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라 기질이 강하고 급했으며 목청이 크고 대화에도 생략이 많았다. 이로 하여 당산 앞 제방을 <땅뚝>이라 하였으며 모래둑, 모래벌을 싹뚝 잘라서 <불>이라 했던 것이다. <불>에는 회까리막의 서쪽 논자락을 따라서 방풍용 소나무가 자랐다. 방풍림이 늘어선 사이에는 작은 모래 언덕들이 있었는데 애장터(애기 무덤)였다.


1898년 6월 말 경, 모내기를 마치고 농민들이 들에 나와 물꼬도 돌보고 시비도 하면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마을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 일본인 수십 명이 하시끼(돌 싣는 배) 두 척에 나누어 타고 와서 <불>에 내렸는데 길 안내를 하는 녀석은 아침나절에 쫓겨 간 왜놈이며 몽둥이를 들고 살기등등하여 마을로 쳐들어오니 마을 사람 모두는 맞아죽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침나절의 일이란 이러했다.


이날 오전 10시경 일본인 5,6명이 큰 목선을 몰고 와서 마을 사람들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불>에서 모래를 퍼 싣고 있었다. 들일을 가던 부녀자들이 이를 보고는 작업을 못하게 제지했으나 뻔뻔스런 일인들은 여인네를 희롱하고 큰 소리만 쳤다. 이에 격분한 남정네들이 몰려가서 옥신각신 몸싸움 끝에 이들을 쫓아 버렸다.


역부족 세부족 하여 줄행랑 쳤던 일인들이 동료를 규합하여 이처럼 몽둥이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시비의 진원지가 된 길고도 두툼한 용당 해변의 모래둑 <불>을 중심으로 하여 해안선을 살펴보면 좌우로 자갈밭이 길게 뻗쳤으며, 마을 앞 해변에는 고 보드러운 금모래가 깔려서 활처럼 만을 이루어 밀려오는 파도를 분산시켜 마을과 전답을 보호해 주는 기능을 지닌 자연의 선물이고 걸작이었다.


마치 천칭(天秤)처럼 자연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용당의 해안선이었다. 마을의 동쪽 <불>에서 모래를 퍼내면, 서쪽 해변(다리집 부근)의 사토가 물살을 깎여서 동쪽으로 이동한다. 자연의 균형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학 관계를 모르는 일본인들이 모래를 퍼 가니 주민들이 기를 쓰고 막은 것이다. 마을에서 일본인의 행패가 시작 될 즈음, 갓골의 논에서 일하고 있던 김재연(金在連 20세), 소연(小連, 18세) 씨 형제에게도 소식이 전해졌다. 집안일을 걱정하면서 두 사람은 가래를 놓고 마을로 달려왔다. 형제가 한 무리의 일본인과 처음 마주친 곳은 <불>어귀였다고 한다. 몰려오는 일본인들을 보니 목도채를 들었고 행색은 철로꾼 같았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노인과 어린이를 데리고 장고개 산 숲 속으로 몸을 숨겨서 집들은 텅 비어 있었다. 긴장한 두 사람이 한 발짝씩 거리를 좁히고 있을 때 기회를 노리던 일본인의 목도채가 바람을 가르며 두 사람의 면상으로 떨어졌다. 맨 주먹 뿐인 두 사람은 재빨리 몸을 피하면서 멀찌기 물러섰다고 한다. 형인 김재연 씨는 용력이 대단한 장사였다. 다급해서 맨 손으로 <불>에 있던 소나무 두 그루를 뽑아 드니 뿌리 채 뽑혔다고 한다. 형제는 소나무 몽둥이를 나누어 쥐고 일본인들과 난투를 벌였다. 수적으로 우위에 있는 일본인들도 사력을 다해 싸우는 두 사람을 당해내지 못해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 때 일본인들의 우두머리가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원진으로 공격 진영을 바꾸었다. 〈땅뚝〉과 <불>의 접합 지점에는 자갈이 널려 있었고 곧이어 자갈 세례가 퍼부어 전세는 바뀌었다. 자갈비 속을 두 사람이 무사히 벗어난 것을 당시의 사람들은 사중구활(死中求活)이라고 했다. 중과부적의 싸움터에서 우위를 지켜 왔던 두 사람이 원진 속에서 갇혀서 한때 위기에 빠졌으나 무사히 사지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형제가 전력으로 질주하여 아랫마을을 파고드는데 뒤로는 일본인들이 악을 쓰면서 따라 붙는다. 두 사람이 아래 윗마을의 분기점에 이르렀을 때 눈앞에는 폭 10m 쯤 되는 못(池)이 앞길을 막는다. 이 못은 마을 회관(동사무소 1호) 북쪽에 있었는데 김복도(金福都) 씨 집 서편이며, 신명수(辛命守) 씨 집 뒤켠에 있었다. 옛적에는 못이 크고 수량도 많았으나 주변에 인가가 들어서면서부터 담치, 조개껍질 등 생활 쓰레기를 이 곳에 버리게 되면서 수량이 줄고 못 둘레도 많이 좁혀졌다. 전설적인 이 못은 1960년 이후 완전히 매립되어 지금은 할머니 중노당(中老堂)1)이 앉아 있다.


해방 전후에 못 주변에는 갈대와 잡초가 어우러지고 장사잠자리가 못 주위를 맴돌았다. 1990여 년 전 본동의 아랫마을과 윗마을 사이에는 큰 못이 있어 장고개 물을 모아 바다로 흘려보냈다. 이런 지형적인 조건으로 재연씨 형제가 윗마을로 직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작은 못에 막혀 있다가 두 사람은 못 위로 몸을 날렸다.


형은 건너편으로 안전하게 착지했으나 동생은 못에 빠지고 말았다. 일본인들은 재연 씨가 못 건넌 것을 기이하게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를 지르다 물러갔다.


사계 중 <불>에 가장 생기가 넘치는 계절은 여름이다. 낮에는 벌거숭이로 멱을 감고 지천으로 널린 잘피를 캐서 입술에 파랗게 잘피 물이 들도록 군것질을 하고 모래밭을 뒹굴다가 모래 뜸질도 하고 피곤하면 잤다. 밤이면 별을 헤며 거닐던 <불>은 개발로 자꾸 낮아서 힘을 잃더니 사라호 태풍 때 피해를 입었고 이후 동명목재에서 매립을 하여 사라지게 되었다.



1) 경로당은 80세 전후의 할머니가 계시고 중노당은 70세 전후의 할머니들이 계셔서 다르게 부른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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