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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쿠리터와 돌개고개| 용당동

신작로를 개설하면서 불 못지않게 용당 사람들에게 심적 부담을 준 곳이 〈소쿠리터〉였다. 〈소쿠리터〉란 초기 용당 사람들이 땅의 생김새에서 만들어 낸 명칭이다. 용당의 지형을 소쿠리처럼 생긴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바다를 향해 동서로 뻗은 두 산줄기를 소쿠리의 좌우 테로 정하고 본동과 갓골의 분기점이 돌개고개 마루의 동서로 뻗은 능선을 소쿠리의 안쪽 테로 잡고 입구는 남쪽으로 벌려 놓아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무진장한 복을 움켜쥐게 하려는 발상에서였던 것 같다. 이러한 생각처럼 어업이 활기를 띠었던 시절에는 용당이 부자 동네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선대 어른들은 “용당 사람은 북쪽 사람과 혼인하면 불행해진다.”는 말들을 했는데 이 말을 〈소쿠리터〉와 연결해 보면 이해가 된다. 〈소쿠리터〉를 보존하기 위해 북쪽의 개발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1930년 전후의 혼맥을 짚어보면 70% 이상이 용호동과 연결되어 있다 . 용당과 감만동 간의 혼사는 이웃이면서도 뜸하였고 용호동과의 혼사가 흔하였다 〈소쿠리터〉가 헐리면서 〈돌개고개〉도 착평되었다.


〈돌개 고개〉란 돌개(石浦) 즉 석포(현 UN묘지 입구)로 가는 고개라는 뜻이다. 약 4백년전 돌개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포구였다. 이 곳에 소금가마가 설치되어 소금을 생산하기도 했으나 그 후 자연 매립으로 부경대학교 앞까지 지면이 넓혀져 소금가마도 분포(현재의 용호동)로 옮겨갔다. 돌개는 포구가 없어진 후 유명무실해졌으며 돌개가 없어진 돌개고개도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신작로가 나면서 〈소쿠리터〉의 전설도 사라져 갔고, 본동과 갓골의 거리도 좁혀졌다. 현재의 용당 동사무소에서 북쪽으로 100m 정도 되는 지점에 산자락을 깎고 남은 작은 솔밭이 있었다. 이 솔밭은 몇 개의 무덤과 아름드리 소나무들로 장관을 이루었다. 〈검은 솔밭〉이라 불렸던 이 곳은 1960년대 이후 도로에 편입되고 말았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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