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명

home 남구이야기 > 지명
  • facebook
  • twitter
  • twitter

뻘끼이 고개| 용당동

뻘끼이 고개는 보오지산과 용마산의 두 산줄기가 갈라서는 남쪽 길목에 있는 잘록한 산허리를 말한다.


뻘끼이 고개의 어원은 벌기(?期)에서 나왔다. 묵은땅을 일구어 ‘들을 넓힌다.’는 뜻으로 고개 아래쪽 구릉을 개간하면서 붙여진 지명인 듯하다.


이 고개 마루에서 카 작은 소나무가 있는 남쪽 산길을 이백여 미터 들어가면 장사(將士) 발자국이 각인된 사과 궤짝 만한 잿빛 바위가 있다. 장사 발자국은 이 지역에서 전해지고 있는 용마산의 용마와 관련된 이 바위는 처음에는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서 다음을 기약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재답사 하여 그 바위를 찾을 수가 있었다. 크기가 다른 두개 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는 바위였다. 이 발자국은 길이가 19㎝ 정도 되는 크기로 5,6세 정도 되는 어린이 발자국처럼 통통하고 복스럽게 보인다. 이 발자국을 두고 옛날 애기 장사가 있었는데 겨드랑 짬에 날개가 있었다는 말이 전해 온다. 또 다른 발자국은 길이가 43㎝, 폭이 16㎝정도 되는 크기로 어른 장사 같은 큰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바위가 있다.


이 장사가 용마를 끌고 갔는지 말 발자국도 몇 군데 찍혀 있는 바위도 있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으니 2000년 겨울에 재조사하러 갔을 때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던 바위들이 공공근로사업을 하면서 잿빛 바위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용마 발자국의 이야기도 이제는 전설처럼 우리들의 관심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 고개는 나무꾼과 백운포로 물 나들이 하던 부녀자들이 아픈 다리를 쉬어 가는 곳이다. 이 고개에 올라서면 동남쪽으로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지며 손에 잡힐 듯한 곳에 오륙도가 서 있고 1990년 초에 준공된 오륙도 방파제와 아치섬 방파제가 남북으로 누워 있다. 1944년 경 이 고개 위에 일본군의 고사포 부대가 들어서면서 남쪽 봉우리에는 서치라이트가 설치되고 신선대의 정상에도 대포를 배치했다. 일제는 부산의 방어를 위해 여러 곳에 고사포와 서치라이트 등을 배치했던 것이다. 일제가 쫓겨 가면서 뻘끼이 고개도 해방을 맞이했다. 포대와 군대 막사, 참호, 목탄 차량 등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추어 홀가분한 고개가 되었다.


그러나 미군이 용당에 진주해 오면서 양공주를 대동하고 처음 찾아간 곳도 바로 이 고개였다. 1950년 대 말 경 동쪽 용호동 산에 천주교 묘역이 설치되면서 장례 행렬 소리를 들어야 했으며 1970년대 동명목재가 분개고개에서 망 너머 고개까지 산복 도로를 냈을 때 뻘끼이 고개도 불도저의 발에 짓밟혔다. 1980년 초 동명목재가 분해된 후 어떤 사람이 이 고개 마루에서 보신탕용 개를 사육하기 시작했다. 합판을 붙여 지은 막사에는 집주인의 잠자리와 개의 잠자리가 판자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그 막사 자리는 일제의 군용 막사 자리였다. 그 사람이 개들을 산짐승처럼 놓아 먹여서 뻘끼이고개는 개판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 고개는 너무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 고개에는 소각장이 들어서 있으며 용호동 이기대를 연결하는 해안도로가 뚫려 있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맨위로가기

목록

만족도조사 ㅣ 현재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와 편의성에 만족하셨습니까?

  • 5점(매우만족)
  • 4점(만족)
  • 3점(보통)
  • 2점(불만)
  • 1점(매우불만)
등록하기
  • 담당부서 : 문화예술과 문화예술팀  
  • 담당자 : 최병욱
  • 전화번호 : 051-607-4063
open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