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이전의 용당 사람들의 생활| 용당동
다음은 윤랑근 씨에 의한 이야기이다. 용당 사람들은 대부분 조그맣게 농사를 짓던가, 아니면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며 살았다. 용당의 주택은 제주도처럼 초가집과 돌담이 특색이었다. 용당의 형편은 인근의 용호동과 달리 가난했다. 예를 들면 일제시대 때 라디오나 시계가 있는 집이 없었다. 극동석유의 석산에서 12시와 오후6시에 남포를 터뜨리는데 그 소리를 듣고 때를 알았다고 한다. 가난한 시절의 한 가지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한국전쟁 이후 한 젊은이가 집에 시계를 사다 달아 놓고 때가 되면 시계 밥 주라는 말에, 그 어머니가 ‘갈치 구워 채려주었는데 밥 먹지 않더라’고 말하였다는 우스운 일화가 그것이다. 또한, 동장이 난 집안에서 다시 동장이 나오고 다른 집안의 사람이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을 만큼 텃세가 심한 곳이었다.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과는 결혼도 하지 않았다. 북쪽 사람과 결혼하면 좋지 않다고 하여 남천동이나 대연동과는 혼사를 하지 않았고, 또 동쪽의 감만동과도 하지 않았다. 주로 용호동 사람과 혼사를 하였고, 아니면 하루 종일 걸어서 가는 사상쪽 사람들과 혼인하였다. 용당은 인근의 용호동과는 달리 주로 어업을 하며 생활한 어촌이었다. 전기불에 대한 용당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이복기 씨는 전기도 용당이 제일 먼저 들어오고 반농반어로 돈도 많았으므로 다른 지역으로부터 용당으로 시집오는 사람은 웃고 들어오고 용당에서 다른 지역으로 시집가는 사람들은 울고 간다고 했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