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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목재| 용당동

동명목재 이미지

동명목재는 60,70년대 한국 수출을 주도해 왔고, 한국 합판 산업의 초석을 마련, 동양 굴지의 합판 생산 업체로 발전하였으나 80년 신군부에 의해 해체된 부산의 향토 기업이다.

1920년 후반, 동구 좌천동(당시 제재소는 일본인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음)에서 무명(無名)의조선 청년 한 사람이 일본인들이 못쓴다고 버린 나무를 재생하는 재목 사업을 시작했다. 일본 사람의 땅을 빌려 시작해 계속 임대료가 올라가는 난관 속에서도 누구보다도 강한 자립심과 근면으로 동명 그룹의 전신인 동명목재상사의 기틀을 다져 갔다. 그는 당시 진구 범일동의 구 동명목재 장소로 물색했던 부지를 일본인으로부터 끈질기고도 집요한 설득을 한끝에 어렵게 부지를 매입하여 제재 공장을 세웠다. 제재 공장이 완성되기 전에 해방이 되었다. 제재 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려면 원목 구입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 때문에 끄는 또 한번의 고충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1950년 6ㆍ25전쟁 이후 전쟁 물자 조달과 미군이 들어오면서 합판 수요가 늘어났고, 이에 따라 제재소와 합판 공장은 곧 정상을 회복하고 사세 확장에 들어갔다. 10평 내외의 좁은 터에 제재소를 설립하여 내 힘으로 내 사업을 경영하여 돈을 벌겠다는 독립 경영의 길을 나선 그는 일단 꿈을 실현하였고, 그로부터 40년 뒤에는 부지210만평, 연건평 5만여 평, 종업원 만여 명 규모로 연간 500억 원 이상을 돌파하는 단일 품목 생산 공장으로서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동명목재 상사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화 같은 일을 해 낸 사람이 바로 동명그룹의 고(故) 강 석진(姜錫鎭) 회장이다. 한 개인의 불굴의 의지와 맨주먹으로 시작했던 일이 이제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국가경제의 초석으로 기여하게 된 것이다. 


동명목재는 1960년 가을, 남구 용당동에 부지를 확보하여 동양 제일의 합판 공장을 초현대식 규모로 설립하여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1962년 제품의 우수화를 위해 품질관리제도를 채택하였고, 1963년 9월 구 공장의 기계 설비를 용당 공장으로 완전 이동하여 정상 가동시켰으며 1964년 원목 입항으로 생산성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생산성의 급격한 향상으로 제1공장만으로는 해외의 신용도와 고객의 수요에 부족하여 1966년 11월 제2공장 건설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1969년에 제2 공장을 건설 가동하였다. 동명목재는 계속 성장을 이룩하여 1968년, 1969년, 1970년 연속 3년 동안 전국 수출 1위의 수출 최고상을 획득한다. 동명목재는 원목을 100%수입에 의존하면서도 우수 합판을 생산해 내는데 그 기선을 놓치지 않았다. 

동명목재에서 생산한 합판은 여러 종류가 있으나 합판의 종류는 분류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누어진다. 

먼저 보통 합판과 특수 합판이 있다. 보통 합판은 목재를 얇게 절삭한 합판인 단판으로 구성되어 서로 인접한 단판의 섬유 방향이 거의 직교하도록 접착제로서 접착한 것으로, 적층 매수는 3, 5, 7, 9 등으로 홀수 매수이다. 특수 합판은 구성특수합판과 표면특수합판으로 분류되는데, 표면특수합판 중 동명에서는 보통 합판의 표면에 여러 가지 형태로 홈을 판 것으로 합판은 동명목재의 생산품으로 사이딩 파넬(Siding Panel) 이 있고 눌러서 표면 가공을 한 형갑 합판인 엠보스 합판(Embossed Plywood)이 있다. 

1976년도까지 한창 수출 주문이 많았던 것은 미장합판이다. 이 미장합판은 천장 재료용 합판인 아트 실링(Alt Ceilling)이다. 그리고 1977년부터 유럽 및 미주 중동 지역으로부터 요구되는 미장합판 제품은 보통 합판을 소판(素板)으로 한 미장합판도 많았으나 가구용재, 선박용재, 건물의 칸막이용 벽, 주방기기 재료 등에 필요한 구성특수합판을 소판으로 한 미장 제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동명에서 생산되는 수지함 침지 오바레이 합판 중 가장 먼저 생산한 것은 DAP합판이다. 이것은 목재 무늬 등 여러 가지 무늬가 인쇄된 원지(原紙)를 디아릴 프탈레이트 수지에 함침시켜 함침지를 고온 고압 상태에서 접착시킨 합판이다. 오바레이의 일종으로 콘크리트 양생용 거푸집 재료 합판인 TEGO 필립 오바레이 합판은 1977년 5월 국내는 최초로 생산에 성공하여 유럽, 중동 등지로부터 생산 능력을 초과하는 주문량을 받았다. 이 합판의 명칭은 수지함 침지생산의 정상을 자랑하는 서독의 〈테오도르 골드 슈미트〉사의 수지함 침지 명칭인 TEGO-TEX로부터 붙여진 것이다. 

처음 생산한 테코 합판은 다양한 용도와 화학적 성질이 우수하기 때문에 점차 고도의 품질을 요구하는 시장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는데 유력한 제품이다. 미장합판은 주로 미장 벽재, 미장 후로아, 미장 천정 등 용도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누고 있으나 명확하게 분류되지는 않는다. 이는 사용처와 수요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미장 벽재는 주로 건물의 고급 내장 재료로 사용되는데 단판 배열의 종류 중 북매치 미스매치 방법으로 접착하여 만든다. 미장합판 중 많은 수요가 있는 것이 팬시 필링(Fanc Peeling)이며 이것은 미스매치로 접착되나 단판 폭이 3-4인치 등으로 일정하게 접착된 것으로 U형 구루브를 이음선을 따라 가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미장합판을 접착한 후 U형 홈을 일정한 간격으로 단판 이음선을 따라 가공하여 표면에 투명 도장한 것이다. 동명에서 생산하는 미장 후로아에는 두께 0.3mm의 미장합판을 체크 보드 매치로 다양하게 응용하여 접착한 팬시 후로아 (Fancy Floor)와 두께 3mm이상의 두꺼운 미장합판을 건조시킨 일정한 크기로 절단 조립하여 접착한 파케이 후로아(Parquet floor)가 있다. 일반 합판의 표면에 주로 나무 무늬를 자연 그대로 재현하여 인쇄 모양지를 붙여서 미장합판의 효과를 낸 합판을 일반적으로 페이퍼 오바레이 합판(paper over-laid plywood)이라 하는데, 동명에서는 이 종류의 합판을 “라미나 합판”(합판 위에다 종이를 붙이는 작업을 일컫는 Laminating에서 유래한 듯 함.)이란 상품명으로 생산하였다. 

1960년대 도입된 프린트합판은 크게 인기를 모았는데, 이 프린트 합판은 표면에 눈매움 등을 하고 표면을 평활하게 한 후 나무 무늬가 새겨진 쇠로라도 단색 또는 두색 이상의 여러 가지 색깔의 도료로써 인쇄를 한 합판이다. 1976년도부터 여러 가지 색깔의 인쇄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다이렉트 프린트 머신(Direct print machine)이 도입되어 비로소 고급 프린트합판이 다이렉트 프린트 합판을 일반 프린트 합판과 함께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합판은 여러 가지 색으로 정교하게 인쇄된 것이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라미나 합판과는 쉽게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인쇄 기술을 돋보였고, 원가 면에서도 라미나 합판보다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렇듯 동명목재가 품질이 우수한 여러 합판을 생산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접착제 개발이다. 

접착제 공장의 연구진에 의해 발명 특허품인(특허NO.1218) 합판용 접착제인 요소수지를 비롯하여 완전 특수 내수 합판 접착제인 석탄산수지 내수합판용 접착제, 메라민 수지, 수용성 접착제인 아크릴 수지, 파티클 보오드용 농축접착제, 섬유가공용 메라민 수지 및 요소 수지 그리고 수용성 강력 만능 접착제 등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시설 규모는 동양 최대로 생산 능력이 무려 월간 6,000여 톤이며 또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일본 및 대만 그리고 동남아로 월간 2,000톤씩 수출하여 그 품질을 인정받으면서 명실 공히 세계 정상을 달리고 있는 동명의 접착제 공장은 계속 증설 확장되었다. 


70년대 초부터 80년 5월 신군부에 의해 동명목재가 해체되기까지 약 8년간 이곳에 근무했던 김종호(1946년 생)씨는 동명목재 해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70년대 노동 집약 산업사회에서 부산 경제를 거의 고무와 합판이 지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특히 동명목재가 국가나 지역사회에 기여한 바는 말 할 수 없이 컸지요. 그만한 기업이 하루아침에 쓰러졌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고,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입니다.” 남구에서 30여년을 거주해 온 김종호 씨는 동명목재가 향토 기업으로서 남구 발전에 기여한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명목재는 용당 부락의 판도를 바꿔 놓았습니다. 아마 그때가 용당 부락의 최고의 전성기였을 겁니다. 용당 본촌은 동명목재 해체 이후에 오히려 축소되고 빈약해졌다고 봐야지요. 제가 알기로는 상주인구의3분의2가 썰물처럼 빠져나갔어요. 동명목재가 들어서고 용당 뒷골목, 하수 등이 제대로 정비 되었고, 일반 음식점 운영도 지금보다 훨씬 실속이 있었을 겁니다.” 당시 품질관리과에 근무하다가 비상기획과로 옮겨 근무했다는 김종호씨는 무엇보다도 동명목재가 1,8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을 갖추고 있어 (현, 부산 세관 옆) 지역 민방위 대원의 교육을 전담해 지역사회 뿐 아니라, 국가의 이익에 기여한 바가 컸다는 사실을 뿌듯하게 회고했다. 


이제 동명목재는 한편의 신화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동명은 교육 문화 사업의 으뜸인 동명문화학원과 동명불원이 남구 지역의 특색으로 부상하고 있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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