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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소식 ([6.25발발 65주년 특집] 백두산함동지회 황상영 회장이 들려주는 대한해협해전)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6.25발발 65주년 특집] 백두산함동지회 황상영 회장이 들려주는 대한해협해전
작 성 자 관리자 등록일 2016/04/15/ 조   회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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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과 골리앗 싸움 … 오륙도 앞 승전보는 天運"

한국전 발발 당일 북 특수부대 600명 태운 수송선 격침

전쟁 물꼬 돌린 `오륙도판 명량대첩' 불구 역사에 묻혀


 "선제사격을 한답시고 함포를 쐈는데 `쾅'하는 포소리에 대원들 모두가 얼이 빠졌죠. 포탄 한 발에 100달러나 해 돈이 아까워 나무포탄으로만 연습을 했으니 당연했죠. 450톤의 낡은 군함으로 적 특수부대원 600명을 태운 1000톤급 무장수송선과 싸워 이긴 것은 지금 생각해도 하늘이 도왔습니다. 그때 우리가 적함을 격침시키지 못했다면 이 나라는 어찌 되었을지…."

 한국전 발발 당일인 1950년 6월 25일, 일반인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륙도 앞바다에서는 `명량대첩'에 필적할 해상전투가 있었다. 대한해협해전으로 불리는 이 전투의 승전보는 결과적으로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의 발목을 잡고 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게 전사가들의 평가다. 

 지난 16일 해무가 잔뜩 낀 오륙도 선착장 인근에서 당시 이등수병(탄약운반수)으로 백두산함을 타고 전투에 참가했던 황상영(83) 백두산함동지회 회장을 만났다. 그에게 65년 전 전쟁의 물꼬를 바꾼 `오륙도대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PC-701로 명명된 백두산함은 우리 해군의 첫 전투함이다. 2차 대전 때 대서양에서 독일잠수함 탐색작전에 활약하다 전후 미국 뉴욕주 해양대학 실습선으로 활용하려던 것을 우리 해군 장병과 그 가족들의 성금 등 6만 달러를 모아 구매했다. 미국 조선소에서 수리를 거치고 하와이에서 3인치 함포를 장착하고 전쟁 발발 두 달 전인 1950년 4월10일에 진해항에 도착했다. 뻘겋게 녹슨 배를 승조원들이 달려들어 녹을 털어내고 방부페인트를 칠해야 했다. 

 백두산함과 승조원들은 6월 24일 해상훈련을 마치고 진해에 정박해 있던 중 상부의 다급한 무전을 받고 25일 오후 3시께 경계임무차 동해로 이동했다. 황 회장은 "이때까지만 해도 승조원들은 전쟁이 터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무기라고는 3인치 직사포 한 문과 탄약 100발이 전부. 이마저도 실탄사격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오후 8시12분 백두산함은 부산 동북방 약 10마일 해상에서 부산 방향으로 남하하는 괴선박 한 척을 발견한다. 선체는 온통 검게 칠해졌고 국기도 선명도 없는 국적 불명의 배였다. 국적, 출항지 등을 묻는 발광신호를 보냈지만 반응이 없었다. 

 오후 9시30분 선체에 접근해 서치라이트를 비추고 망원경을 들여다보니 선수에는 대포, 선미에는 기관포가 장착돼 있었다. 그리고 갑판에는 국방색 차림의 무장군인들이 잔뜩 움츠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승조원들의 머리털이 곤두섰다. 황 회장은 "함장인 최용남 중령이 이북 출신이라 대뜸 북한병사들임을 직감했다"고 말했다. 

 26일 0시15분 해군본부에 상황을 보고한 뒤 함장은 승조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냉수 한 잔 씩을 따라 마신 뒤 전원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게 했다. 소박한 출정식이었다. "이때까지도 솔직히 적인지 아군인지 확신은 못했어요. 그래서 함장님이 꾀를 냈죠. 일단 위협사격을 해보면 아군이면 가만있을 테고 적이면 응사할 것이니 포를 한 번 쏴보자고 말이죠."

 26일 0시30분 마침내 위협사격으로 백두산함의 3인치포가 불을 뿜었다. 그러자 곧바로 적함으로부터 기관총탄과 소총탄이 소나기처럼 퍼붓기 시작했다. 다행히 적함과는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있어 총탄은 닿지 않았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포탄 100발 가운데 50발 정도를 쐈고 그 중 10여발이 적함에 명중했던 것 같아요. 다들 전투 경험이 없다보니 적함 마스트가 포탄에 맞아 넘어지는 것을 보고 배를 침몰시킨 줄 알고 뛸 뜻이 기뻐했죠. 엔진으로 움직이는 배는 마스트가 없어도 상관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26일 01시 38분 정신없는 교전 끝에 적함은 불꽃과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서서히 바닷 속으로 가라 앉았다. 적함이 침몰한 것으로 추정되는 해역을 서너차례 돌아 선박 파편과 부유물 그리고 침몰한 선체를 확인했다. 한시간여 치열한 교전으로 아군 2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제서야 오륙도등대 불빛이 아스라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전투에 참가한 백두산함 승조원은 73명. 국가의 명운을 결정지은 이 전투는 그렇게 세월 속에 잊혀졌다가 반세기가 훌쩍 흐른 2007년에야 전국에 흩어졌던 전우들을 수소문해 백두산함동지회가 결성됐다. 73명 가운데 20여명이 살아있었다. 고령 등으로 매년 사망자가 늘어 올해에만 두 명의 전우를 잃었다. 현재 백두산함 용사들은 황 회장을 포함해 14명만 남았다.

 황 회장은 "적함은 우리보다 전력이 월등히 뛰어났지만 특수부대를 해안에 상륙시키는 게 주목적이어서 교전에는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며 "천운 중의 천운"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시 적 특작부대는 후방교란을 위해 부산 침투를 계획하고 있었다. 김일성도 훗날 "3주 만에 남한을 적화하려던 계획이 대한해협해전의 패배로 좌절됐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한편 백두산함은 이후에도 여러 임무에 투입됐다가 1959년 7월 1일 퇴역 후 해체됐다. 마스트(돛대)는 현재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존 중이고 2010년 문화관광부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하지만 역사성이 높은 3인치 포는 보존에 실패, 해군사관학교에는 같은 종류의 함포를 전시해 놓놓아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황상영 회장은 누구

탄약운반수로 대한해협해전 참가


 1950년 2월 18세에 해군에 입대, 백두산함 탄약운반수로 대한해협해전에 참가했다. 직업군인으로 생활하며 월남전에도 참전했다. 예편 후 선박 관리업체인 대신선박㈜을 설립, 경영을 해오고 있다. 70년대 초 당시 남구 망미동에 정착해 지금까지 살고 있고 수영구 분구 이전 남구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한국해군동지회와 백두산함동지회 회장을 함께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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