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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소리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21/05/11/ 조   회 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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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원고와 지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 채택된 원고에 대해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부산남구신문 편집실 ☎607-4077, 1225honey@korea.kr

곽태욱의 바람고개 이야기Ⅱ

그 시절 남구에 극장 4곳 있었다

 그 시절 남구에 영화를 상영하던 극장이 4개나 있었다고 하면 당장 `에?'하는 반응을 보인다. 그와 반대로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현재 70대의 나이를 전후한 토박이라 할 수 있다. 부산영상위원회에서 발간한 `부산극장사'를 참고해서 기억을 더듬어 보면, 먼저 대연동에는 용연극장이 있었다. 관람석이 885석으로 1970년에 개관해서 1980년에 폐관되었다. 문현1동의 보영극장은 328석으로 1962년 개관, 1977년 폐관되었다. 문현로터리의 대성극장은 526석으로 1960년 개관, 1978년 폐관되었고, 우암동의 동원극장은 240석으로 1962년 개관, 1980년 문을 닫았다.
 용연극장은 지금의 남부소방서 대연119안전센터 건너편 전자랜드 파워센터 대연점 자리에 있었고, 보영극장은 지금의 이마트 문현점 위치쯤에 있었으며, 대성극장은 지금의 곱창골목 뒤 하천 복개주차장에 접한 문현교통광장 녹지 쉼터쯤에 있었고, 동원극장은 지금의 양달마을 행복센터 자리에 있었다. 당시 부산지역의 모든 극장은 단일 건축물 구조에 높은 천장을 가진 `단관' 영화관이었다. 남포동이나 서면의 개봉관 또는 외화 전용의 중심극장이 아니면 대부분 변두리 삼류극장으로 인식되었고 2편 동시상영이 대세였다. 2편 동시상영의 장점은 영화 상영과 관객 대기 시간이 짧고 가성비가 좋았다. 하지만 푹신하지도 않은 접이식 걸상에 온종일 몸을 파묻은 채 하루해를 지우는 얌체 관객은 골칫거리였다.
 극장마다 차이가 있는 정중앙의 대형 스크린 앞에는 어림잡아 가로 10m, 세로 5m 안팎의 무대가 있었다. 그 무대 위에서 펼치는 유명 가수와 코미디언들의 열연을 통해 관객들은 울고 웃었다. 당시에는 영화 상영 전 모두 기립해서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통과의례도 있었다. 애국가가 끝나면 `대한뉴스'가 이어졌고 그 뒤 중독성 강한 CM송과 함께 기업의 제품 광고가 따랐다. 그때쯤 임검석(臨檢席)에 앉아있던 순경은 순찰을 마친 듯 자리를 뜨기도 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도중 어쩌다 필름이 끊기면 영사기 불빛뿐인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휘파람 소리와 야유가 합창처럼 어우러지기도 했다. 그때까지 생리현상을 참고 있던 사람들은 그 혼란을 틈타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어떤 땐 극장의 영화 상영 일정과 겹치는 바람에 부득불 유명 가수와 코미디언 초청 쇼를 극장 가까운 제3의 장소나 가설무대에서 진행할 때도 있었다. 당시에는 부모님 손을 잡고 극장을 입장하면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라도 별 제지당하지 않았고, 그 든든한 뒷배 때문에 교외지도 선생님을 맞닥뜨린다 해도 그다지 염려되지 않았다. 극장은 예매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현금을 내고 매표소에서 영화 관람권을 사야 했다. 관람료는 성인의 경우 30원쯤 되었고 `조조할인'도 했다. 1966년 무렵 도시근로자 한 가구당 월급이 1만 원 정도라는 어떤 통계가 맞는다면 당시 서민들의 팍팍한 삶 속에서 영화 `향유비용'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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