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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사람들 (조선통신사에 가려진 실무적 외교사절단 한·일 우호의 상징 `문위행 역관사(問慰行 譯官使)를 아십니까)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조선통신사에 가려진 실무적 외교사절단 한·일 우호의 상징 `문위행 역관사(問慰行 譯官使)를 아십니까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22/01/03/ 조   회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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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54회 대마도 오간 실질적 `대일 창구'
1766년 오륙도 앞바다서 해난사고로 93명 수장
남구서 추도제 열려 … 향후 추도비 건립 논의

 우호와 친선외교의 대명사로 일본을 왕래한 조선통신사는 잘 알지만, 조선통신사보다 더 자주 일본을 왕래했던 조선 정부의 외교사절단 `문위행(問慰行)'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통신사는 일본 막부의 수장인 관백을 위한 사절단인 반면, 문위행은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대마도를 오간 외교사절단이었다. 조선 후기 1632년부터 1860년까지 통신사가 12회 파견된 반면 문위행은 54회 대마도를 오갔다.
 `위문 행차'라는 뜻의 문위행(問慰行)은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역관들로 구성돼 `문위행 역관사'라 불렀다. 주로 대마도 도주의 즉위나 퇴임을 축하하고 현안 외교사안 등을 협의했는데 사절단 규모는 정사(당상관)와 부사를 포함해 100명이 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문위행은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일본과의 외교를 복원하기 위해 시작돼 일본 정세를 살피고 외교적 현안을 푸는 등 조선 후기 실질적인 대일 외교 창구 역할을 맡았다.
 문위행 가운데 대규모 해난사고가 두 번 발생했다. 1703년 2월 5일 대마도 도착 직전 와니우라항 앞바다에서 풍랑에 배가 뒤집혀 조선인 108명과 일본인 4명 등 112명 전원이 익사했다. 또 1766년 7월 19일 문위행 일행을 태우고 부산을 출발한 배는 오륙도 인근에서 부서져 조선인 87명, 일본인 6명 등 93명이 물에 빠져 숨지고 10명이 구조되었다. 이 날의 참변은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해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증정교린지에 사고 경위와 당시 임금이던 영조의 수습 조치 사항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부산향토사 민간 연구모임인 부산초량왜관연구회(회장 강석환)가 `제5회 문위행 역관사 해난 영령 추도제'를 12월 30일 오륙도스카이워크 광장에서 개최했다. 강남주 전 부경대총장과 부산지역 역사연구자, 부산초량왜관연구회 회원 등 30여명이 참가했다.
 대마도는 조선 역관사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91년 히타카츠항 인근 한국전망대 옆에 조선역관순란지비라는 추모비를 세웠다. 초량왜관연구회는 2016년부터 매년 이곳을 찾아 추도제를 지냈는데 코로나19로 이번에는 오륙도스카이워크 광장에서 가졌다.
 오륙도는 문위행 해난사고에 있어 매우 의미있는 장소다. 1766년 사고는 오륙도 앞바다에서 일어났고 부산에서 대마도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이 때문에 부산초량왜관연구회는 문위행 역관사 추도비 설치 장소로 오륙도 해맞이공원을 첫손에 꼽고 있다. 대마도 추도비는 1703년 사고를 당한 역관사를 추모하는 것이고 오륙도 일원에 건립될 추도비는 1766년 사고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강석환 회장은 "해난사고 직후 영조의 명으로 수몰된 역관들의 넋을 기리는 제단을 오륙도 일원에 설치한 기록이 있다"며 "남구에 문위행 역관사 추도비가 세워지면 많은 의미와 함께 스토리텔링을 통해 역사관광콘텐츠로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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