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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륙도 칼럼
작 성 자 문화미디어과 등록일 2023/02/01/ 조   회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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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 전 일이다. 대학을 마치고 재직하던 수자원공사에서 퇴근 무렵, 여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울먹이면서 동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중풍을 앓던 어머니가 갑자기 앞을 못 보고 허공으로 손을 휘젓는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용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다녔으나 소용이 없었다. 생모의 투병과 임종은 가족은 물론 30대 초반인 나에게 쓰라린 충격을 남겼다.
 나는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치며 숱한 번민 끝에 한의학 유학의 결정을 내렸다. 당시는 국교 수립이 안 되었던 때라, `중공'으로의 유학절차가 까다롭고도 복잡하였다. 1992년 8월, 한중국교 수립이 체결되자 나는 드디어 중국유학 허가증을 거머쥐게 되었다. 늦여름의 매미 울음이 유난히 요란스럽던 날,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붉은 간판과 자전거의 물결을 헤치고 천진에 발을 들여놓았다.
 만학도로서 엄격한 전공 공부를 따라가기 위해 밥을 먹으면서도 처방약명을 외워야 했다. 기숙사 벽은 온통 한약이름과 침의 혈자리로 도배되었다. 모친의 죽음으로 출발한 유학이었기에 새벽에 일어나 부속병원 환자들의 가래를 일일이 확인해도 마음에 다 차지가 않았다. 한의학에 대한 열정은 그렇게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육아문제를 비롯한 가장의 역할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어깨를 짓눌렀다. 아내도 같이 공부를 했기에 기숙사 복도에서 소리치고 싸우는 아이들을 맡기기 위해 학교 바깥의 탁아소를 찾아갔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하는 탁아소에 세차례 더 찾아간 끝에 월요일에 아이를 맡기고 토요일에 찾아올 수 있게 되었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어린 것들을 떼어놓으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주말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탁아소로 가 창가에 서서 아이들을 몰래 바라보곤 했다. 5세 누나가 3세 동생의 양말을 챙겨주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 아내의 자전거는 언제나 눈물로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 중약학(中藥學) 수업시간이었다. 부자(附子)는 더운약으로 그 독성이 매우 강하여 오용할 경우 생명에 치명적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교실을 뛰쳐나갔다. 눈먼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복용한 약에는 부자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한약방에서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약 다루는 것을 배운 사람이 동네를 돌며 약을 지어주었다. 우리 집에도 몇 차례 들러 "부자를 써서 몸을 데워야지"하던 이야기도 함께 떠올랐다. 장기간 병마로 기혈이 소진된 상태에서, 부자의 뜨거움이 어머니의 몸을 지펴 주체 못할 화(火)가 취약한 눈에 타격을 주었다. 부자의 그 잔인한 독성과 약을 다루는 사람의 무지 앞에 떠나간 어머니, 어머니 죽음의 원인을 알아버린 그 날, 50도가 넘는 고량주를 들이부어도 나는 취할 수가 없었다. 황해 건너 먼 한반도 고향 산자락에 한줌 흙이 되어 있는 어머니를 나는 목 놓아 부르고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도 그동안의 공부와 고생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중의대(中醫大) 출신자가 한국에서 이미 한의원개원을 하고 있었음에도 한중 수교 후 중의학 학위는 한국 내에서 인정받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동안의 공부가 아까워 중국중의약과학원 석사과정을 지원하였으나, 그토록 어렵게 취득한 학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뼈아픈 현실 앞에 나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때 나를 일으켜 세운 분이 면접 때 만난 임란(林蘭) 교수님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공직을 그만두고, 처자식을 데리고 유학을 왔다는 점에서 교수님은 나에게 깊은 관심과 놀라움을 보였다. 그 때 들려준 `차가 산 절벽에 다다라도 반드시 길이 있다(車到山前 必有路)'는 말씀은 지금도 내 책상머리에 적혀 있다.
 북경에서 석사 논문 마무리를 하던 중, 집안일로 잠시 귀국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우윳값도 쩔쩔매던 그즈음, 우연히 경력직 공무원 모집 공고를 보았다. 필기시험이 통과되고 면접까지 치른 후, 논문 정리를 위해 중국으로 돌아갔다. 북경에서 인터넷으로 확인한 최종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 석자를 꿈인 양 발견하고 은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교수님이 더 감격스러워했다. 극심한 불황에 한국에서 기존 직장인도 자리를 잃는 마당에 마흔을 넘긴 가장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은 하늘의 보살핌이라며.
 며칠 후, 대륙에서 한의학에 바친 젊음과 열정의 시간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오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팔월, 짐보따리를 끌고 은사님 댁으로 인사를 올리러 갔다. 떠나는 제자 앞에 달리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학생활의 마침표를 찍는 나는 나대로의 상념에 젖은 채 말을 잃었는데, 그 순간에도 선생님의 섬세한 손길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여러 개로 꾸린 짐보따리가 허술하게 보였던지 커다란 가방을 꺼내 짐을 일일이 정리해 준 뒤 내가 차를 타는 곳까지 따라 나왔다.
 고향집을 다녀올 때면 늘 어머니는 크고 작은 짐보따리를 이고 신작로까지 바래다 주었다. 내가 올라 탄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던 중풍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이번에는 택시가 출발하자 "이군, 꼭 성공해야 돼(老李, 一定成功)!"라고 외치며 은사님이 손을 흔들고 계셨다.
 순간 내 한의학 유학의 처음과 끝을 보았다. 어머니의 상실에서 출발하여 나는 골짝을 헤매는 목마른 사슴처럼 낯선 땅에 한의학을 공부하러 왔다. 대륙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 내가 보았던 어머니가 눈앞에 일렁이어 온다. 출장길의 눈 내리던 북경의 밤을 포근하도록 손수 짠 털스웨터를 덧입혀준 어머니, 한복 치마저고리를 건네 단아할 북경의 어머니를 언제고 한번 뵙고 와야겠다.

이명래
부산남구신문 편집위원·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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