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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에서 떠오른 손기정 선수와의 추억
작 성 자 홍보담당관 등록일 2024/01/05/ 조   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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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래
미국 오이코스대 교수
산림치유지도사

숲길에서 떠오른 손기정 선수와의 추억

 40년 전의 일이다. 손기정의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책 기사가 취업준비생인 나의 눈에 들어왔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퇴근을 앞둔 출판국 직원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서울 남산에서 광화문으로 뛰고 있었다. 마라톤 책을 구하기 위해 마라톤으로 달렸다. 지난 10월 연휴에 서울 딸아이가 손기정 영화 `1947 보스톤'을 봤다고 아내의 휴대전화로 전해왔다. 순간 치유의 숲에서 만난 대왕참나무가 머릿속으로 일렁이며 지나갔다.
 가까스로 수중에 들어온 손 선수의 자서전을 밤 사이 독파했다. 이튿날 아침 선생께 전화를 드렸다. "젊은이가 부르면 어디든 간다"하시며 서울시청 뒤 대한체육회 지하 다방으로 약속 장소를 정해주셨다. 윗분이라 15분쯤 일찍 나갔다. 그런데 다방 안쪽에 연붉은 색의 안경을 끼신 노신사 차림의 선생이 먼저 와 계신 것이 아닌가. 한소절 한소절 이야기에 빨려들어갔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중국집에서 일한 적이 있다. 마라톤 연습시간이 부족해 새벽시간을 이용했다. 혹여 늦잠을 잘까봐 2층에서 잠을 자면 1층에서 주인이 발목에 묶인 끈을 당겨 잠을 깨웠다. 어느 날 한밤중에 도둑이 들어와 드리워진 끈에 발이 채여 도둑이 줄행랑을 친 적도 있다.
 이렇게 기량을 다듬어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다. 선수단은 일본에서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과 신의주를 거쳐 유럽횡단열차로 베를린에 도착했다. 마의 언덕 비스마르크 고개를 넘는데 따가운 가을 햇살이 쏟아지며 기진맥진했다. 강물을 스친 한줄기 바람이 지나갔다. 압록강변의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뜀박질로 늘 속옷을 적셔오던 아들에게 달리기를 못하게 여자신발을 사다 준 어머니였다. 일제에 강점된 조국도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는 어디서 힘이 났을까, 영국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단거리 선수 못지 않는 속력으로 골인점을 내달렸다.
 3년 전 은퇴한 나는 우연히 산림치유지도사 국가자격증 안내를 보았다. 몇가지 지원자격 중 보건의료 관련 석박사 출신이 눈에 띄었다.나는 중의학 석사학위증으로 시험을 거쳐 산림청자격증을 안았다. 처음으로 산림치유현장에서 대상자를 맞을 때였다. 현장경험이 미약한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때마침 천안아산역에서 본 현수막이 힘을 보태준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시 `방문객'의 구절이다. 대상자를 위해 옷차림은 어떻게 하지? 돌아가신 어머니가 감물을 들인 모시적삼이 앞에 놓였다. 아내가 풀을 먹여 칼칼하다. 그러한 워밍업에도 2% 부족한 불안감을 해소시킨 것은 우연히 눈길이 간 대왕참나무였다.
 숲의 대왕참나무 앞에 어르신들과 같이 선다. 손 선수가 마라톤 우승 기념으로 히틀러로부터 받은 것도 이 나무였다. 왕(王)자 이파리를 단 나무는 모교인 양정고등학교에 심어졌다. 그 학교가 목동으로 이전되면서 나무가 남은 자리는 손기정공원이 됐다. 선생이 다방에서 들려주던 이야기가 있다. `한 분야 정상에 오르면 모든 분야와 통한다'는 것. 청와대에 체육계 대표로 초청이 되었을 때, 정계 재계 예술계 각 분야의 정상이 원탁에 같이 앉게 되더라는 것이다. 나는 대왕 참나무 앞에서 어르신들에게 흑백사진을 내 보였다. 대학시절 학교로 보내준 선생의 마라톤 골인 장면이다.
 영화를 보면서 뇌리 속 오래된 장면이 펼쳐진다. 나는 서른에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중국(당시는 중공)으로 한의학 유학을 떠났다.시골에서 멀쩡하신 생모가 중풍으로 돌아가시자 충격에 코흘리개 두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아내와 황해를 건넜다. 보스톤 마라톤대회 감독의 손기정은 당시 꿈나무 서윤복 선수를 출전시킨다. 서 선수가 2위에서 1위로 탈환하는 순간, 죽을 힘을 쏟게 한 것은 병상의 어머니였다. 나의 인생 마라톤 길목에 계셨던 어머니와 손기정 선수가 마의 언덕을 넘게 한 어머니도 함께 오버랩 된다.
 산림치유지도사로서 대왕참나무 스토리가 어르신들의 회복탄력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개울물소리와 함께 가벼워진 어르신들의 발걸음과 밝아진 얼굴을 보았다. 나름 각자의 인생 골인지점을 향해 달린 분들이 아닌가. 아프리카에서는 도서관으로 불리는 어르신들이다. 정상을 정복한 또 다른 선수들이 대왕참나무 숲문을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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