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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륙도 칼럼
작 성 자 홍보담당관 등록일 2024/01/05/ 조   회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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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륙도 칼럼
위트컴 은혜를 돌에 새긴 세 의인들
강석환·김재호·오상준씨, 장군 업적 발굴하고 세상에 알려


 6·25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차드 위트컴 장군.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대화재가 발생하자 군법에 저촉되는지 알면서도 구호물품을 풀어 이재민 3만명을 도운지 정확히 70년이 흘렀다. 전역 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대한민국과 부산의 재건을 위해 여생을 보내다 1982년 7월 12일 별세 후 UN기념공원에 안장된 지도 40년이 넘었다. 부산역전 대화재가 있고 이듬해 도움을 받은 이재민들이 장군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부산 모처에 공덕비를 세웠는데, 현재 흑백 사진 한 장만 남겨놓은 채 공덕비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위인으로 칭송받지만, 장군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10여 년 전에 불과하다. 60년 넘게 우리들이 까맣게 잊고 있던 장군의 업적과 스토리를 늦게라도 세상에 알린 이들이 강석환 위트컴희망재단 이사와 오상준 국제신문 총괄본부장 그리고 김재호 부산대 교수 세 사람이다.
 위트컴 장군의 흔적 찾기의 시작은 13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2010년 6·25전쟁 6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돼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클리포드 스트로버스씨가 부인과 함께 용두산공원 부산타워를 방문했다. 이때 부산타워를 위탁 운영하던 강석환 이사의 눈에 이들 부부가 보였고 참전용사라는 말에 부산타워를 무료 입장시켜 주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클리포드씨는 1953년 11월부터 1년간 부산 미군44공병대에서 근무했는데 이때 자신이 집적 찍은 컬러 사진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사진 속에 위트컴 장군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위트컴이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아무도 모를 때였다. 사진 속의 위트컴이 밝혀지기까지는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강 이사는 마침 친분이 있던 오상준 국제신문 총괄본부장(당시 사회부 기자)에게 이 사진들과 위트컴 장군의 이야기를 전했고 이게 2011년 6월 25일자 국제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장군의 업적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김재호 교수는 윤인구 부산대 초대총장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자료를 들춰보다 위트컴 장군이 부산대 장전동 부지 50만평을 확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김 교수는 3년의 조사와 수소문 끝에 위트컴 장군이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어 있다는 것과 부인 한묘숙 여사가 서울 용산의 어느 작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강 이사 역시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한 여사를 어렵게 만났다. 한 여사는 "수 십년 간 아무도 남편을 찾지 않았는데 남편의 선행을 뒤늦게라도 알아주니 고맙다"며 강 이사의 손을 잡았다. 몇 해 뒤 강 이사는 아들이 없던 한 여사의 양자가 되었다.
 서로 만날 일 없었던 강 이사와 김 교수는 이 일을 계기로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1년부터 장군의 기일인 7월 12일 유엔기념공원에서 매년 장군의 추모식을 열고 있다.
 오 총괄본부장은 그간에 모은 위트컴 장군의 자료를 토대로 지난 2022년 5월 책 `리차드 위트컴:6·25전쟁 폐허 속에서 핀 인류애'를 발간하면서 조형물 건립에 불을 지폈다. 이들 세 사람의 의기투합이 없었더라면 위트컴 장군의 업적은 지금도 망각의 강에 묻혀 있을지 모를 일이다. 위트컴 장군의 은혜를 돌에 새기는 데 꼬박 70년이 걸렸다.
김성한 부산남구신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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