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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사람들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 개관)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 개관
작 성 자 문화미디어과 등록일 2023/07/04/ 조   회 62
첨부파일
소〈牛〉 수탈부터 피란, 산업화까지 한국 현대사 `응축'
399㎡ 공간에 시대 흐름 따라 3개 테마 배치
역사 체험 전시관 외에 주민 사랑방 역할도
일본 1200년 육식금지령 해제로 조선 소 수탈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 개관

 이번에 개관한 소막마을 주택은 옛 소막사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려는 흔적이 곳곳에 묻어난다. 외형뿐 아니라 내부에는 당시 트러스트(아치 형태의 골조)를 그대로 살렸고 산업화 이후 소막사를 개축하면서 만든 다락방과 일부 내부 벽체도 원형 그대로 남겨놓았다.
 399.84㎡(약 120평) 면적의 소막마을 주택은 일제강점기 소 수탈 현장→피란기→산업기 생활사 등 시대 흐름에 따라 3개 테마로 배치되어 있고 물리적 전시공간을 총 6개의 섹션으로 나눠 놓았다. 다양한 전시물 외에 소막과 관련한 애니메이션들을 자체 제작해 빔프로젝트로 관람할 수 있게 했다. 그 중 일본이 조선에서 들여온 소에 관해 적은 일부 내용이 눈길을 끈다. `조선의 소는 건장, 온순, 기민해 세계 제일이라 칭한다'라는 대목에서 한우가 일본인들에게 크게 사랑을 받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우암동에 소막사가 왜 생겼을까
 소막사는 말 그대로 소가 거주하는 막사를 뜻한다. 소막은 1909년 처음 우암동에 세워졌고 일본으로의 소 이출이 증가하면서 최대 19개 동이 들어섰다. 소막 한 동에 생우 40∼60마리를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소를 송출하던 거점은 당시 국내에는 원산, 성진, 인천 등 6곳이 있었는데 그 중에 우암동이 규모가 가장 컸다. 우암동을 통해 한해 3만마리 이상의 소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우암동에 소막사가 생긴 이유는 메이지유신 이후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서구화)의 기조로 서양인 같은 체질을 갖추기 위해서 국민들에게 육식을 장려하면서부터였다. 일본은 서기 675년 천황 텐무가 가축도살을 금지하면서 1200년간 고기를 먹지 못하다가 19세기 중엽 메이지유신으로 비로소 육식금지령이 풀렸고 이후 육식 수요를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조선 외에도 중국, 심지어 호주에서도 소를 사들였다.
문화미디어과 ☎607-5602

■ 우암동 소막마을
운영:화∼일요일 09:00∼18:00
(월요일, 설·추석 등 명절 기간 휴무)
입장:무료
위치:부산 남구 우암동 189-1123번지
관람 예약 및 문의:070-8830-0010
*주차시설이 없어 대중교통 이용 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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