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산남구신문 > 남구사람들

남구사람들

남구사람들 (슬프면서 아름다운 노병의 `생애 마지막 귀환')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슬프면서 아름다운 노병의 `생애 마지막 귀환'
작 성 자 문화체육과 등록일 2016/06/07/ 조   회 723
첨부파일 4-1cw25.jpg (305 kb)
그룬디.jpg (369 kb)
그룬디2.jpg (554 kb)

슬프면서 아름다운 노병의 `생애 마지막 귀환'

슬프면서 아름다운 노병의 `생애 마지막 귀환'

슬프면서 아름다운 노병의 `생애 마지막 귀환'

 


영국군 시신수습팀 복무 제임스 그룬디씨 인터뷰


 긴 인터뷰를 마칠 즈음 그가 손을 힘껏 들어 "아이 러브 코리아, 아이 러브 부산!"을 외쳤다. 노병은 결코 늙지 않았다.
 이달 초 남구에 반가운 인물이 `다시' 찾았다. 영국군 참전용사 제임스 그룬디씨. 1988년부터 5월이 되면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남구와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하고 있다. 영국 맨체스터주에서 직항노선이 없어 열서너 시간 걸려 한국 땅을 밟는다. "작년 방문이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며 그가 조금 머쓱해했다. 그는 척추암 말기환자다. 림프종까지 암이 전이됐다. 이 때문에 지난해 주치의가 `마지막 여행'을 허락했다. 몸 상태는 1년 전보다 나빠졌고 백내장까지 겹쳐 앞이 잘 보이질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전 `운 좋게' 주치의가 바뀌었다. "새 주치의에게 `원하는 걸 하다 죽고 싶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그의 간절함에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들어준 셈이다.
 중절모부터 외투, 셔츠까지 연갈색으로 일습한 그와의 인터뷰는 공기화 부산교대 명예교수가 대담 형식으로 진행했다.


 -한국에 막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말 해달라.
 군함을 6∼7주 정도 탔다. 이집트, 홍콩 등을 부산항에 도착했는데 굉장히 춥고 습했다. 배에서 내리는데 어느 젊은 한국 여자가 다가와 웃으면서 귤과 사과를 건네줬는데 전쟁 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 놀라웠고 `아 여길 잘 왔구나, 여기서 뭔가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전쟁이 두렵지 않았나.
 시신수습팀에서 2년 넘게 복무했다. 전쟁 자체보다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게 더 무서웠다.
 


 -시신수습과정을 설명해 달라.
 부산에서 대구까지 아군의 시신을 찾아다녔다. 여름에는 땅에서 거품이 올라오는 걸 보고 시신을 찾는다. 주로 논에 많은데 거품이 나면 지팡이로 두들겨 시신 위치를 파악했다. `나이프'라고 부르는 끝이 뾰족하고 널따란 삽같이 생긴 도구로 파내는 시신이 부서지기도 한다. 온전한 시신은 거의 없어 정신적으로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유엔기념공원 조성에 참여했나.
 전투지역에서 시신을 발굴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묘지 조성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사촌형이 유엔기념공원에 묻혔있다고 들었는데.
 그는 2차대전에도 참여했다. 한국전 휴전 3주 전에 심하게 다쳐 일본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 중 숨졌다. 담당 의사에게 나중에 들은 말인데 위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는데도 아프단 말을 한번도 안했다며 놀라워했다. 정말 용감한 분이셨다.


 


 -귀국 후 트라우마는 없었나.
 요즘도 온몸이 땀에 젖어 악몽에서 깨곤 한다. 한국전쟁 때 사진을 찍지 않아 기록물이 없지만 당시 기억은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지금도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 울부 짓는 소리가 생생하다. 하지만 군인과 민간인의 차이점을 구별할 줄 안다. 이게 구별 안되면 굉장히 힘들어진다. 한국에 올 때는 소년이었지만 떠날 때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전쟁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자비를 들여 매년 남구에 오는 이유는.
 여기에 영국군 885명이 묻혀 있는데 모두가 나의 전우다. 만나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 그리고 여기에 오면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할 일도 많다. 묘역을 돌고나면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하게 된다. 영국 실버타운은 살기는 좋은데 너무 따분하고 지루하다.


 


-유엔기념공원에 묻히고 싶어 한다고 들었다.
 기도문에 보면 `여기 잠들어 있는 이들은 절대 늙지 않는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정말 환상적이다. 나는 노인이 되었는데 이들은 여전히 청년으로 남아 있다. 처음 유엔기념공원에 왔을 때 `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죽으면 여기로 와야 겠다'라는 생각을 가졌다.


 


-영국에 한국전쟁 참전용사 단체가 있나
 영구 참전용사협회가 2004년 해산됐다. 1995년까지만 참전용사가 3만1000명 정도 됐는데 대부분 사망하고 지금은 1000명도 안 된다.


 


 -유엔기념공원을 위해 의미있는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다.
 9년 전에 여기 이석주 관리차장이 한국전쟁과 관련된 사진을 영국 현지에서 한번 모아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지금은 건강 때문에 브라이언 호프라는 다른 참전용사에게 그 일을 맡겼는데 열정적으로 잘하고 있다.
 예전 사진을 모을 때 낯선 여자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자신은 참전용사의 딸인데 아버지가 결혼한 지 한 달만에 참전해 숨지는 바람에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사진도 없다며 울었다. 문득 생각해보니 내가 그녀 아버지의 사진을 갖고 있어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조금 있다 그녀의 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엄마가 너무 울어 말을 잇지 못한다고 했다. 사진을 보내주고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재방문 프로그램에 그녀를 추천해 유엔기념공원에서 부친을 대면하게 도왔다. 이후 그녀가 더는 울지 않고 행복해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한국전쟁에 본인이 어떤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나
 내가 시신을 찾지 않았다면 지금의 유엔기념공원은 없었을지 모른다. 대단히 중요한 일을 했다고 자부한다. 이 일이 나를 정말 강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줬다. 현재 영국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한국전쟁을 정식으로 다루는데 브라이언 호프가 많은 기여를 했다. 참전용사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들이 많이 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