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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사람들 (남편·아들·며느리까지 항일투쟁 `독립운동 名家')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남편·아들·며느리까지 항일투쟁 `독립운동 名家'
작 성 자 관리자 등록일 2016/04/14/ 조   회 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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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에 잠든 비운의 독립운동가 안성녀 여사
〈안중근 의사 여동생〉
일평생 만주 벌판 돌며 독립운동
버릇없는 관료 호통치던 대쪽 같은 분
독립운동 증거 없어 60년째 묘소 방치
명예 찾아드리는 게 불효 씻는 유일한 길

민족영웅을 친오빠로 둔 안성녀 여사의 삶은 `예상대로' 순탄치 않았다. 1910년 오빠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숨을 거두자 이미 혼례를 치룬 안 여사는 남편, 친정 일가 등과 함께 중국으로 급거 망명한다. 이후 안 의사 집안이 상해로 이주하고 안 여사의 가족은 만주에 잔류하면서 두 집안은 흩어지게 된다. 1920년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 권승복이 숨지면서 타국 생활은 더욱 힘겨워졌고 결국 만주를 떠나 해방을 맞기까지 외아들 권헌을 데리고 중국 전역을 유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광복이 되면서 여사의 가족은 40여년 만에 조국의 품에 안긴다. 중국에서 태어난 장손 권혁우씨도 할머니 손을 잡고 처음 한국땅을 밟았다. 안 여사를 `누님'이라 불렀다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의 도움으로 서울 쌍림동에 거처를 마련하지만 얼마 안 돼 6·25가 터져 부산으로 피란을 내려 와 1954년 영도구에서 지병과 노환으로 숨을 거둔다. 
 당시 열 살 안팎이었던 혁우씨는 "너무 어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지만 대쪽 같은 분이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생각난다"고 했다. 권씨가 들려주는 일화 한 편은 이렇다. "생활이 궁핍해 할머니가 어린 저를 데리고 부산시장을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비서진들은 할머니가 누군지 몰라 시장님이 있는데도 없다고 둘러댔죠. 조금 있다 시장이 집무실에서 나오는 걸 보시더니 할머니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시장의 머리를 내리치며 호통치던 모습이 또렷이 기억납니다." 
 일본의 재판기록이나 광복군 명단 등 문서상에 여사의 이름이 올라있지 않아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안 여사가 안중근의 친여동생이란 사실은 안 의사 집안 유족들의 여러 증언 등이 이어져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안중근의 5촌 조카인 안춘생(1912∼2011) 선생의 도움이 컸다. 9대 국회의원과 독립기념관장을 지낸바 있는 안춘생(당시 육군 소장)은 안 여사 사망 소식을 접하고는 헌병을 대동해 군용 지프차를 타고 빈소를 찾아왔었다고 혁우씨는 기억하고 있다.

#광복 밑거름 된 독립운동 명문가
 존재 자체가 베일에 가렸던 안 여사의 항일 행적과 분묘의 존재가 세상에 전파된 데는 안 여사의 며느리이자 혁우 씨의 어머니인 오항선 여사를 통해서였다. 오 여사 역시 일제강점기 김좌진 장군 밑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름 높은 애국지사다. 지난 2005년 국제신문이 독립유공자들의 행적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시어머니인 안 여사의 이야기가 우연히 나왔고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비로소 세간에 알려졌다. 오 여사는 당시 "시어머니는 몰래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너무 심해 전면에 나서기 힘들었고 고초를 많이 겪으셨다"고 증언했다. 오 여사는 백수를 두 해 앞둔 2006년 향년 97세에 노환으로 영면했다. 오 여사는 독립군의 식사와 의복을 보급하고 동료들과 함께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기도 했다. 아들 혁우씨는 "1930년 북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이 총격을 받고 쓰러질 때 어머니 품에서 순국했다"고 말했다. 여성으로 드물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안중근의 여동생이란 이름에 가려졌지만 안 여사의 일가만 떼어놓고 보면 `독립운동의 명문가'라 해도 조금의 손색이 없다. 안 여사의 외아들인 권헌 선생(오항선 여사 남편) 역시 항일투쟁에 헌신한 독립투사다. 인쇄소와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독립군에게 군량미를 조달하는 `조용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일반에 알려져 있지만, 혁우씨의 어릴 적 기억과는 조금 상충되는 부분이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어느 가을날 무장한 채 중국사람 두 명과 들판을 지나는데, 우연히 휴식 중인 일본군 소대를 목격하셨답니다. 어깨에 메고 있던 기관총으로 휘갈겨 일본군 전원을 섬멸했는데 이때 총알 세레에 누런 벼들이 우두두 쓰러지던 기억이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권헌 선생은 평소 "대가를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니 사람들에게 떠벌리지 말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선생은 1980년 사망해 현충원에 안장됐지만 혁우씨는 유훈에 따라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신청은 하지 않았다.

#명예 찾아드리는 게 후손 도리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해방 후 혁우씨네 살림살이는 팍팍했다. 일거리를 찾아 1970년 무렵 대연교회 인근으로 이사를 와 지금껏 살고 있다. 영도 청학동에 매장된 안 여사 유해를 용호동으로 옮겨 온 것도 이 때문이다. 혁우씨는 아버지 권헌 선생과 함께 유해를 모셔온 뒤 예전에는 일년에 서너 번 할머니 묘를 참배했지만 근래에는 먹고 사는 게 바빠 잘 찾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취재진이 혁우씨와 함께 안 여사의 묘를 찾아간 지난 12일, 봉분 위 잡풀이 말끔히 베어져 있었다. 누군가 다녀간 것이다. 묘원 관리소장에 따르면 지난달 말 미국에서 누군가가 와 안 여사의 묘를 참배하고 함께 벌초를 하고 돌아갔다고 했다. 의아했지만 참배객이 누군지 달리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한때 안 여사의 행적이 언론에 조명되고 뜻 있는 정치권 인사들이 힘을 보태자 혁우씨는 할머니의 독립유공자 지정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규정집을 내보이며 `문서상의 물증'을 가져올 것을 요구했다. 그나마 할머니를 증언해 주던 모친이 작고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집안에 불이 나는 통에 그나마 갖고 있던 자료마저 모두 소실됐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숨어서 독립운동을 한데다 100년이 지난 자료를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보이면 붙잡고 싶어 한다. 다행히 최근 지역 정치인이 안 여사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 조만간 무슨 소식이 들리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다. "안중근의 동생이자 항일투사였던 할머니의 명예를 찾아드리는 일이야 말로 제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효도라고 믿습니다." 칠순 노인이 된 손자는 빗속에서 우산도 쓰지 않은 채 할머니 묘비를 끌어안고 고개를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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