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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사람들 (푸른 눈의 노병 "내가 묻은 전우 곁에 나를 묻어주오")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푸른 눈의 노병 "내가 묻은 전우 곁에 나를 묻어주오"
작 성 자 관리자 등록일 2016/04/15/ 조   회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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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 참전용사 제임스 그룬디
생애 마지막 유엔기념공원 방문


한국전 당시 시신수습팀 복무
1988년 이후 매년 한국행
척추암 말기 더는 기약 못해
유엔기념공원 묻히는 게 소원

 지난 15일 유엔기념공원에서 열린 프랑스 참전용사 고 레몽 베나르씨의 안장식. 취재진들의 카메라 세례 너머로 벽안의 노신사가 이 안장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영국군 참전용사 제임스 그룬디(James grundy·83)씨, 그에게 이날은 누구보다 의미가 각별했다. 그 역시 사후 유엔기념공원에 묻히기를 염원하고 있어서다. 유엔참전국 가운데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1177명이 전사했다. 그 가운데 855명의 전사자가 유엔기념공원에 잠들어 있고 이들 중 상당수는 그룬디씨의 손에 의해 이곳에 묻혔다. 그는 한국전 당시 영국군 시신수습팀으로 복무했다. 
 그룬디씨가 한국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51년 2월 15일. 당시 만 19세였다. 소년티를 갓 벗은 이 신참 병사는 군함 엠파이어 프라이드호를 꼬박 7주나 타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부산항에 닿았다. 한국이란 나라를 그때 처음 알았다는 그는 "식탁 위의 물 컵을 치면 바로 얼어버리는 끔찍한 추위와 싸워야 했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원래 그는 취사병이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잠시 장례지도사 일을 한 게 알려져 시신수습팀에 밭탁됐다. 그렇게 총 대신 삽, 군복 대신 작업복이 주어졌다. 치열한 전투가 끝난 전장을 돌며 전사한 영국군의 시신을 수습해 귀대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더러 지뢰밭을 파헤쳐 전우의 살과 뼈를 추려야 할 때도 적지 않았다. 시신이 없으면 묘를 세우지 않는 영연방 국가의 관습상 사체 수습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신원확인을 하지 못하는 책임감이 그를 옥죄었다. "어느날 시신 세 구를 찾았는데 군번줄과 신분증이 서로 섞여 있어, 누가 누군지 도저히 확인이 안됐어요. 결국 유엔묘지에 세 명을 함께 합장해야 했죠." 60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가 가장 마음 아파하는 대목이다.
 치열한 전시에도 시신수습팀만의 `특권'도 있었다. "귀대 도중 북한군과 마주칠 때가 가끔 있었죠. 하지만 북한군은 우리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습니다. 일종의 묵계 같은 것인데, 그렇다고 그들을 믿지는 않았어요. 등 뒤가 늘 서늘했죠." 
 정전협정 한 달을 앞두고 귀국선을 탔다. 만 26개월만의 귀환이었다. 800명의 병사가 한 배를 타고 한국 땅을 밟았지만 살아 돌아간 이는 그를 포함해 150명에 불과했다. 영국으로 돌아간 그는 축구선수와 경찰관으로 생활하며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일선에서 은퇴하고 1988년 처음 한국 땅을 밟았고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자비를 들여 매년 한국, 그것도 남구를 찾고 있다. 이번이 서른 번째 방문이다. 한국에 도착하면 유엔기념공원에서만 생활하다 귀국한다. 온 종일 묘역을 돌며 묘비를 어루만지고 옛 동료들과 혼잣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인연도 이번이 마지막이지 싶다. 사실 그는 척추암 말기 환자다. 근래 암이 림프종까지 전이돼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진통제로 매일, 매시간을 버티고 있다. "그 몸으로 어딜 가느냐"며 펄쩍 뛰는 주치의에게 통사정을 해 한국 방문을 허락받았다. 
 유엔기념공원에서 만난 그룬디씨는 암환자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해 보였고 기억도 또렷했다. 하지만 세월 앞에 그도 예외일 수 없는 법. 귀가 잘 들리질 않아 상대의 입술 움직임과 때로 필담에 의지해 의사소통이 해야 했다. 참전용사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도 여지껏 전쟁의 기억을 들춰내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말문을 연 것은 최근 들어서다. 이번 방문에서 언론과의 만남도 적극적이었다. 살아있을 때 전쟁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유엔기념공원에 묻히고 싶은 뜻을 전하기 위해서다. 그룬디씨는 현재 유엔기념공원 관리처를 대신해 영국 현지에서 신문광고를 내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사진과 자료를 모으고 있다. 현재 500명 정도의 얼굴 사진을 모았다.
 이역만리 생면부지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피를 흘린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For your tommorrow, we gave you today(당신의 내일을 위해 우리의 오늘을 바쳤습니다)." 그룬디씨는 3주간 유엔기념공원과 남구 인근에서 머물다 지난 18일 영국으로 돌아갔다.


영국군 참전용사 제임스 그룬디 씨가 유엔기념공원에서 동료들의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척추암으로 이번이 마지막 한국 방문이라는 그는 유엔기념공원에 묻히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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