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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사람들

남구사람들 (반세기 백운포에 잠든 `비운의 독립운동가)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반세기 백운포에 잠든 `비운의 독립운동가
작 성 자 문화미디어과 등록일 2023/02/28/ 조   회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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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주년 3·1절 특집

안중근 가족 이유만으로 36년 중국 망명
독립운동 물증 없어 정부 서훈 못 받아
보다 못한 남구가 구비 들여 묘소 정비
"돌아가신지 70주년, 무슨 자료 있겠나"


 "어, 전에 못 본 안내판이 생겼네?"
 백운포 남구국민체육센터 뒤편 주차장에 차를 댄 권혁우 광복회 부산남부연합지회장이 의아한 듯 말했다.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 여동생 안성녀(루시아) 여사의 묘'라고 적힌 안내판에는 묘소를 쉽게 찾을 수 있게 약도가 그려져 있다. 남구가 지난해 10월 정비한 안내판이다. 권 지회장은 "대한민국 정부보다 남구청이 할머니 묘소를 더 정성껏 챙겨줘 늘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104주년 3·1절을 앞두고 백운포 천주교 묘역에 잠든 안성녀 여사의 묘소를 찾았다. 조붓한 산길을 5분쯤 오르자 검은 묘비가 세워진 여사의 묘소가 눈에 들어온다. 여사는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유해를 현충원으로 옮기지 못한 채 용호동 백운포 산자락에 50년째 잠들어 있다. 방치된 여사의 묘를 남구가 2016년 8월 15일 구비를 들여 오석 묘비를 세우고 길을 닦았다. 이때 푹 꺼진 묘소 봉분도 함께 정비하려 했지만 여사의 손자인 권 지회장의 만류로 하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할머니가 곧 서훈을 받아 현충원에 모실 줄 알았어요. 그냥 그때 봉분도 같이 손을 봤으면 좋았을 걸…."
 백운포 천주교 묘역에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묘가 있다는 사실은 20년 전에 알려졌다. 지난 2005년 광복 60주년 맞아 국제신문이 안 여사의 며느리이자 권 지회장의 모친인 고 오항선(1910.7.∼2006.8.) 애국지사를 인터뷰하는 도중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안중근의 여동생인데 가까운 용호동 산기슭에 묘가 있다"는 말을 무심코 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안중근보다 두살 아래인 안 여사는 1909년 하얼빈 의거 직후 일제의 보복을 피해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도피했다. 중국 다롄의 려순(뤼순) 형무소로 오빠 안중근을 면회갔다 돌아가는 길에 일본군에 끌려가 나흘간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중국에서 양복점을 꾸리며 군복 제작과 수선해서 번 돈을 독립군 군자금으로 은밀히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 여사는 중국 망명생활 중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외아들 권헌은 김좌진 장군과 함께 무장투쟁을 한 오항선과 결혼했다. 아들 권헌 역시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펼치며 독립운동의 명가를 이었다고 한다. 중국 관료의 도움으로 북경에서 인쇄소를 운영하며 생활하던 중 라디오를 통해 해방소식을 접한 안 여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들 내외와 손자만 데리고 부산행 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36년의 망명생활을 접고 꿈에 그리던 조국을 밟았다. 이후 6·25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1954년 4월 8일 숙환으로 향년 73세 별세했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안 여사가 안중근의 여동생임은 인정하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물적 자료(재판 판결문이나 신문기사 등)가 없어 지금까지 서훈을 거부하고 있다. 유족들은 "돌이켜보면 할머니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고 말했다. 1970년대 중반 정부가 독립유공자 신청을 마지막으로 받을 때였다. 권 지회장의 부친인 권헌 선생은 "나라에 뭘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다"라며 독립유공자 신청을 완강히 거부했다. 하지만 며느리 이용순씨가 시아버지 몰래 시어머니 오항선 여사의 인적사항을 적어 서울에 올라가 신청서를 접수했고 오 여사는 1977년 여성으로 드물게 건국포장을 받았다.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다시 추서됐다. 이 씨는 "그때 좀 더 용기를 내서 작고한 시할머니(안성녀)와 시아버지의 인적사항도 함께 올렸으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할머니는 100년 전 중국으로 피신해 은밀히 광복군을 도운 분입니다. 안중근 가족이라는 말만 새나가도 목숨이 위협받던 시절, 더욱이 남편 잃고 자식들 딸린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독립운동 증거물을 보관할 수 있었겠습니까? 답답합니다." 정부의 높은 벽을 실감한 권 지회장의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처럼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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