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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전 감만동 동담산의 비극을 아십니까
작 성 자 문화미디어과 등록일 2022/11/01/ 조   회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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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남구신문 감만동 사진을 보고

 9월 1일자 제319호 부산남구신문의 남구 근대사 복원 프로젝트. 1952년 감만동 70년의 변천사 사진을 보고 펜을 들었다. 나는 1939년 감만동에서 태어났다. 사진에 내가 나고 자란 고향 생가가 그대로 나타나 있는 걸 보고 감개무량했다. 인간은 누구나 흘러간 세월 후엔 추억들이 아름다운 여운을 남기기도 하고 아픈 추억도 갖게 된다. 사진에 나오는 동담산 지명은 나에게는 너무나 강렬한 기억 속에 남아있어 지금도 뇌리를 주마등처럼 스친다. 일제강점기 동담산 정상에는 일본군 고사포 부대가 있었다. 허나 이 포대는 위장 포대였다. 대포 대신 전봇대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비스듬히 세워놓은 가짜 포대였다. 나무에 기름을 먹인 전봇대였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 미 공군 B-29폭격기가 일본군 고사포를 피하기 위해 유효 사거리 밖 고공으로 날았다. 그리고 낙하산이 3개 이상 달린 대형 폭탄을 고공에서 투하했다. 폭탄 투하 시 요란한 바람소리가 났다. 낙하산에 바람이 부딪치는 소리다. 부산항 봉쇄작전이었다. 바다 속에 떨어뜨리고 그 위를 일본군 군함이 지나가면 폭발하는 대형 폭탄이다. 실제 부산항 내에는 화물선과 군함이 침몰됐다. 이 폭탄을 워낙 고공에서 투하되기 때문에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바다를 벗어나 떨어졌다. 바닷가 옆 마을인 감만동에는 마을 가운데 폭탄이 떨어지면 일본군 소방대가 와서 수거해갔다. 그런데 어느 날은 동담산 정상에 폭탄이 떨어졌다. 산꼭대기이기에 소방대가 수거하지 못하고 해방이 됐다. 당시 산업시설이 없는 주민들에게는 생계를 위해 다이너마이트로 고기를 잡았다. 그래서 다이너마이트는 비싼 물건이 됐다. 마을에 내 친구 아버지는 조금은 별난 사람이었다. 친구 아버지는 어느날 동생과 함께 지게를 지고 동담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대형 폭탄을 분해해서 다이너마이트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무지하고 무리한 일이지만 생계를 위해서 한 일이다. 그런데 이 폭탄은 불발탄이 아니다. 군함에 부딪치면 폭발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아무런 폭탄 지식도 없이 두 형제가 정으로 뇌관을 분해했다. 친구 아버지는 과거 철공소에 근무한 경험으로 정과 망치로 폭탄을 분해한 거다. 대형 폭발이 일어났다. 동담산이 흔들리고 흙, 벽돌로 만든 집이 무너지기도 했다. 동담산 꼭대기에 큰 구멍이 났다. 화산이 폭발한 곳과 같은 구덩이가 깊게 파이고 온 마을은 난리가 났다. 저녁시간 아버지가 밭에서 일하고 귀가했다, 동담산 아래 아버지 밭이 있었다. 밭두렁 소나무 가지에 사람의 살점이 걸려있었단다. 친구 아버지 형제 시신의 일부다. 그 후 아버지가 폭탄 파편을 주워왔다. 불가사리처럼 생긴 폭탄 껍데기가 찢어져 밭두렁까지 날아온 것이다. 이 쇠붙이의 무게는 정확히 모른다. 대충 15㎏로 짐작된다. 이 파편에 새끼줄을 메달아 보릿짚 쌓아두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하는 추 역할로 썼다. 수년 동안 그 쇠붙이를 볼 때마다 친구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동담산의 비극이다.
 감만동 사진을 보면 감개무량하다. 미군이 찍은 사진은 틀림없다. 사진에는 동항초등학교도 보인다. 이 사진 이후 이 학교는 미군통신부대에 징발됐다. 한때 장거리 미군 통신부대가 점령해 있었다. 내 형님이 이 부대 식당에서 근무했다. 아버지는 손수레를 끌고 매일 부대로 들어가 잔반과 쓰레기를 싣고 나왔다. 말이 잔반이지 그 당시 씻어서 사람이 먹었다. 쓰레기 역시 빈 깡통도 돈이 됐다. 부대에서 일어나는 미군병사의 사생활도 많이 보았다. 아버지가 수레를 끌고 부대로 들어가면 수레를 밀고 따라 다녔다. 출입증은 아버지만 있었지만 아들인 줄 미군이 알고는 정문에서 출입을 허가했다. 마음 좋은 미군은 비스킷도 껌도 주었다. 지금도 우리 집에는 그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배관연장 담는 베로 된 손가방과 총기름을 담는 기름통도 남아있다. 당시 통신부대에도 사격용 실탄이 지급됐다. 전시 중이라 통신병도 사격훈련을 하게 돼 있었다. 허나 사실상 통신병들은 사격훈련을 하지 않았다. 부대검열이 나오면 부대 내에서 카빈 2연발총으로 부대 산 밑 절벽 흙을 향해 마구 사격했다. 총알을 소비하기 위해서다. 검열이 끝나면 탄피를 가져나올 수가 있었다. 당시 비싼 값으로 팔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한 많은 동담산은 가슴에 새겨진 산이다. 공비출현은 허위정보였다. 김봉술 감만동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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