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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소식 (`유엔묘지' 38년〈 1954∼1992년 〉 지킴이 … 그의 증언이 곧 역사)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유엔묘지' 38년〈 1954∼1992년 〉 지킴이 … 그의 증언이 곧 역사
작 성 자 문화체육과 등록일 2016/10/26/ 조   회 677
첨부파일 1-2cw12.JPG (180 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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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묘지' 38년〈 1954∼1992년 〉 지킴이 … 그의 증언이 곧 역사

`유엔묘지' 38년〈 1954∼1992년 〉 지킴이 … 그의 증언이 곧 역사


 



유엔기념공원 산증인 정 태 홍 씨 국내 첫 인터뷰


 


조성 초기 20년간 유일한 한국인 직원
미군 도와 유엔군 안장 … 매장기록지 서명
54년 유엔군·북한군 유해교환 기억 뚜렷


 


 유엔기념공원(옛 유엔묘지)을 `세계 유일의 성지'라고 말하지만 정작 공원이 어떻게 조성되고 관리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51년 조성되기 시작한 유엔기념공원은 59년에야 민간인 출입이 허용됐다. 관리권이 한국으로 넘어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74년부터다. 그 이전까지 20년 이상 유엔기념공원은 미군과 유엔이 관할해 그때의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이런 `기록의 암흑기'를 밝혀줄 유일한 증인이 정태홍(86) 씨다. 그는 공원이 조성되던 1954년부터 1992년 퇴임까지 40년 가까이 유엔기념공원에서 근무했다. 특히 1974년 이전 스무 해 동안 공원을 지킨 유일한 한국인이다. 그는 1954∼55년 유엔군과 북한군의 유해 교환 당시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부산문화회관 뒤편에 묻어둔 수 천 구의 적군 유해를 파내 일일이 배낭에 담아 화물열차에 실어 판문점에 올려 보냈고 거기서 유엔군 유해와 맞바꿨어요. 북한에서 넘겨받은 유엔군 유해는 다시 열차로 우암동까지 싣고 온 뒤 유엔묘지에 가매장했습니다. 그 뒤 매달 한차례 부산항에 미군배가 들어오면 유해를 다시 꺼내 옮겨 실었어요. 그 당시 남구 일대가 시체 냄새로 진동했지만 불평하는 주민은 별로 없었어요."
 전쟁으로 대학 진학을 못한 그는 1953년 우연한 기회에 미8군에서 통번역하는 일을 하게 됐고 이듬해 유엔묘지로 배속됐다. 당시 유해 매장에 미군 3개 중대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미군을 도와 안장자들의 매장기록지를 작성하고 때로 직접 서명날인을 하기도 했다. 이때 사망 경위, 시신 상태, 가족 관계 등의 정보가 담긴 10여 장의 매장기록지 사본을 유리병에 넣어 유해 옆에 묻었다. 훗날 유해를 옮길 때 신원이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지금도 공원 묘역의 전몰용사 머리 맡에는 그가 작성한 매장기록지가 함께 묻혀 있다고 한다.
 그가 기억하는 초기 유엔기념공원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당시엔 묘소마다 하얀 나무 십자가가 꽂혀 있었다. "비바람에 나무십자가가 삭아 이름이 지워지고 색이 벗겨져 5∼6개월에 한 번 씩 십자가를 교체하거나 색을 칠해야 했어요." 나무 묘비는 1963년에 지금의 동판묘비명으로 모두 교체되었다.
 유엔기념공원의 관리권이 미군에서 유엔으로, 다시 한국(11개국 관리위원회)으로 바뀌면서 그의 신분과 직책도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이런 부침에 다른 동료들이 하나둘 공원을 떠났지만 그는 계속 남아 일을 할 수 있었다. 유엔기념공원의 내막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한국인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공원 초기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사실상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기록을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팔순 중반의 고령에 몇 해 전 덮친 뇌경색으로 예전만 못해도 여전히 기억력은 좋은 편이다. 2008년부터 유엔기념공원의 고문으로 위촉돼 여러 자문을 아끼지 않고 있다.
 〈관계기사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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