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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재개발로 지워질 역사의 현장, 그래서 더 가슴 아린 추억들)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재개발로 지워질 역사의 현장, 그래서 더 가슴 아린 추억들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22/09/14/ 조   회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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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감만동 70년의 변천사


 1952년 봄, 전쟁 중에 미군 병사가 감만동 동담산 기슭에서 파노라마로 찍은 평화로운 마을 모습이다. 사진 상단의 오른쪽엔 아치섬과 영도가, 왼쪽에는 신선대와 그 아래의 짙은 송림이 보인다. 중간의 오른쪽에 몇 그루의 큰 소나무가 있는 곳이 무민사(武愍嗣)가 있는 곳이며, 중앙에서 오른쪽 끝까지 동담산 둘레에 옹기종기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감만동의 본 마을이다.
 중간의 왼편 넓은 운동장이 있는 곳은 남구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동항초등학교인데, 지금은 아래의 보리밭 대부분이 학교로 편입되어 있다. 학교 위쪽은 현재 주택가로 되어 있는데 볕이 잘 들어 따뜻하다고 하여 양지마을이라고 한다.
 무민사에서 왼쪽 언덕이 솔개고개(松浦고개)로 그 언덕에는 현대1차부터 3차 아파트가 높이 솟아 있다. 맨 앞에 있는 현대2차아파트 아래로 내려가면 옛 흰 모래사장이 있었던 모래구찌인데, 한때 백사장, 선착장, 맛있는 횟집으로 유명했던 `다마내기집'도 사라졌다. 맨 마지막의 현대1차아파트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감만1동 산229번지에 일제강점기 전까지 이곳 특유의 장례풍습인 초분장(草墳葬)을 했던 `외봉터'가 지금은 작은 아파트 옆에 소방도로로 되어 있다.
 외봉터에서 더 위로 오르면 검게 보이는 곳 인근에 용당동 아랫마을의 뒷산인 `돌산'이다. 이 돌을 캐내어 L자 모양의 `신선대 방파제'를 만들었다. 돌산 근처에는 일본군이 주둔했던 창고 몇 동이 있었는데, 동항초등학교가 미 통신부대에 잠시 징발당하였을 때 교사(校舍)로 사용했던 곳이다.
 돌산에서 더 위로 돌아 오르면 공동묘지가 있었던 부경대학교 용당캠퍼스의 후문에 닿는다. 이곳에서 용당장고갯길을 만나게 된다. 그 인근엔 남구의 원주민조차 관심을 잃은 `항공대학(옛 남구예비군훈련장)'이 있었던 곳이다. 긴 능선으로 뻗은 헐벗은 산은 말이 없으나, 감만동 사람들은 홍곡산을 `영업이산'이라고 하기도 했고, 대연4동 사람들은 `평정산', 용당동 사람들은 `우룡산'이라고 불렀다.
 동담산의 오른쪽 아랫마을 너머에 보이지 않는 산이 태성산인데, 그 산의 해안에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인 감만포(1635∼1652년 존속)와 포이포(包伊浦)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제2항만단 쪽과 바다였던 버스 종점까지 매립되어 수군 사령부였던 좌수영은 흔적도 없다.
 일제는 `오랑캐를 이기다'라는 감만(戡蠻)이란 용어를 매우 싫어했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남쪽의 오랑캐인 왜구를 물리쳤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암동에 주둔했던 아까사키부대(赤岐部隊)의 명칭을 따서 문현동 끝자락에서 우암동까지의 지역을 아까사키(赤岐)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려말 왜구를 무찔렀던 최영 장군을 모신 무민사를 없앨 심산으로 그 일대 소나무를 베었고, 장군의 위패를 없애려 했던 일도 있었다.
 지금 사진으로 보이는 일대는 학교와 현대아파트를 제외하고 재개발되어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고려 말에 감만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곳에 홍곡산(虹谷山)이란 이름대로 무지개가 피어오를지 기대해야겠다.

글=공기화 남구향토사 연구위원
사진=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이무현 명예기자(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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