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특집

home 부산남구신문 > 기획·특집
  • facebook
  • twitter
  • print
기획·특집 (용호마을 두 기생의 삶과 죽음, 430년 만에 소환하다)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용호마을 두 기생의 삶과 죽음, 430년 만에 소환하다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22/04/04/ 조   회 185
첨부파일
임진왜란 430년, 이기대 팩트 체크
1592년 4월 13일, 이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무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선봉군 2만명을 전함 700척에 나눠 태우고 부산 해안에 도착해 조선의 봄을 피로 물들였다. 이기대는 왜장을 껴안고 남구 앞바다에 몸을 던진 두 기생의 스토리가 전해져 오는 장소다. 임진왜란 발발 430년을 맞아 두 기생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좌수영 남쪽 15리 두 기생의 큰 무덤 있다'
19세기 승지 이영하 이기대 유래 최초 기록
2001년 내영지 국역 중 이기대 단서 발견
용호 주민들 매년 4월 25일 두 기녀 제사
10년 후 장자산서 이기총 추정 무덤 발견


# 이기대(二妓臺)와 내영지(萊營誌)
 이기대(二妓臺)의 유래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2001년이다. 부산시가 일본 천리대학 도서관에 보관 중인 『내영지(萊營誌)』 원본을 빌려와 『국역 내영지』(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1. 4)를 세상에 내어놓음으로써 이 문헌의 사료적 가치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 문헌 산천조(山川條)에 "이기대는 좌수영 남쪽 15리에 있다. 위에 두 기생의 큰 무덤이 있다 한다."라고 소개돼 있다. 좌수영이란 정3품 수사가 주장인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을 줄인 말이다. 그러면 『내영지』가 왜 일본 천리대학 도서관에 있는가? 그것은 일제 강점 때 약탈당해 일본으로 반출된 수천 종의 문화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일본 천리대학 도서관에 등재된 『내영지』 편찬자는 `경연참찬관 이형하(李亨夏)'로 되어 있다. 그는 조선 25대 철종 원년(1850) 경상좌수사의 임기를 마치고 경관직인 `통정대부 행절도사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줄여서 `승지')으로 전임한 직후 직접 서문을 써서 『내영지』 편찬을 마무리한다. 이 문헌을 『동래영지(東萊營誌)』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표제는 『내영지』이다.
# 부산포와 인연 깊은 승지 이형하
 이기대의 유래를 밝혀준 승지 이형하는 부산포와 인연이 깊다. 그는 헌종 14년(1848) 다대포진의 다대첨사를 지낸 뒤 경관직인 승정원으로 전임한다. 이듬해인 철종 즉위년(1849) 임금의 교지를 받고 경상좌수사로 부임한다. 이보다 5년 앞선 헌종 10년(1844)에는 그의 맏형 이원하(李元夏)가 경상좌수사의 소임을 마친다. 그는 경상좌수영 도임 후 영내에 변변한 기록이 없어서 안타까워한다. 이에 자신의 먼 친척과 책실(비서) 2인이 경상좌수영 영내ㆍ외 마을에 대한 갖가지 자료를 모아서 부족한 부분은 채우고 넘치는 부분은 간추려서 총 51개 영역으로 구분한다. 이 다방면의 자료는 경상좌수영의 진영지, 지리지, 읍지 성격을 띠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경상좌수사의 소임을 마치고 다시 승정원으로 옮겨간다.
# 두 기생의 순절에 대한 평가
 임진왜란(1592) 때 왜장을 끌어안고 바다에 몸을 던진 두 기생의 순절을 258년 뒤에 부임한 경상좌수사 이형하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먼저 그의 집안을 보면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아버지, 장인, 맏형 모두 절도사 등의 고위 무관을 지냈다. 그도 25살 때 무장 가문의 후손 중에서 인재를 특채하는 음관(蔭官) 자제로 종9품 무관인 초관(哨官)으로 출사하였다. 포도대장을 지낸 친할아버지의 천거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임금의 어가(御駕) 앞을 훈도하는 선전관을 지내기도 한다. 또 평안도 개천 군수, 다대첨사, 승정원, 경상좌수사, 다시 승정원으로 전임한다. 이때는 `통정대부'와 `경연참찬관'이라는 문반 벼슬도 받는다. 구전에 의하면, 당시 두 기생의 순절에 의해 왜군 지휘관들이 죽은 직후 좌수영에 배속되어 있던 왜군 기생들과 보급물자 등을 모두 부산진성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만하면 여느 장수에 못지않은 전공을 세운 것에 비견될 만하다. 그래서 승지 이형하는 『내영지』 산천조 30항목에 1개 항목을 새로 추가해 `이기대' 두 기생의 존재를 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너른바위 석벽에도 후대인들이 두 기생의 순절을 기리도록 `二妓臺(이기대)' 세 글자를 깊이 새기게 했는지도 모른다.
# `의부지(義婦地)'로 승화된 이기총 묘역
 임진왜란 이후 경상좌수영 영내ㆍ외 모든 마을의 백성들 족보에 `의부지(義婦地)'라는 장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의부(義婦)란 `옳은 일, 의로운 일, 바른 일'을 하여 그 행적을 기리고 우러름의 대상이 된 여자를 일컫는다. 바로 두 기생이다. 여기에는 그녀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조수간만의 물때 세는 법, 어로 방법, 약초 효능, 바느질, 문해력 등을 가리킨 은사적 삶의 고마움이 녹아 있었다. 따라서 이기총 묘역이 `의부지'였던 것이다. 1800년 초에 조성된 대연동 경주 이씨 문중의 `양섭지묘(良燮之墓)'에서 이 장지명이 발견되었다. 경주 이씨는 약 560여 년 전 지금의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 정문 일대에 `용소'의 전신인 `고이리'라는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족보에는 `양섭지묘'가 `의부지 남동쪽 언덕에 안장돼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묘는 이기총에서 약 11시 방향으로 30m쯤 바닷가로 내려간 곳에 있다. 정확하게 남동쪽이다. 이외에도 용호동, 대연동 여러 문중 족보에는 이기총 묘역을 `의부지(依夫地)', `의부지(依復地)', `이부등(利扶嶝)', `이부지(利扶地)'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세월 따라 글자가 바뀌긴 해도 모두 `의로울 의(義)'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 두 기생의 천추 한을 위무해 왔다
 신축년(1601) 봄 이기총 앞에서 두 기생의 넋을 위로하는 무혼제가 열렸다. 구전에 의하면 두 기생의 절의를 추앙하는 동래부 기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 제의(祭儀)에 참석한 사람들은 용호동, 대연동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 무혼제를 지낸 이후 두 기생은 단순한 관기가 아니라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졌다. 용호마을 사람들은 그녀들이 순절한 4월 25일을 기일로 정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내주고 이기총 묘역도 벌초하고 돌보았다. 일제강점기에도 그와 같은 정성은 계속되었다. 용호동 개성 왕씨 왕기세(1888년생) 선생은 1930년대 말부터 그 일을 시작해서 1965년까지 매년 충무동 등지의 권번 기생들을 초청해 이기총의 주인을 추모했다. 할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어린 손자 왕정문도 이제 7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지만 용호만 자연생태환경지킴이로 활동하며 이기대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쏟고 있다.
# 새로 쓰는 이기대
 대연동 토박이 공기화 부산교육대학교 명예교수도 어릴 때부터 집안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기대 유래와 이기총 관련 자료를 찾으려고 도서관을 전전하며 애를 썼다. 그러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에게 『국역 내영지』를 빌려 읽고 이기대 유래와 이기총에 대한 역사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돼 우연한 장소에서 왕정문을 만나 이기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뒤 장자산 산정을 수차례 오르내리는 등 고생 끝에 온갖 넝쿨과 잡목에 휩싸여 있던 `이기총'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때가 2011년이다. 바야흐로 왕정문, 공기화 두 분의 노고를 통해 새로 쓰는 이기대의 출발점이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부산남구신문 한 페이지를 장식했고, 2014년 발간된 우리 고장의 향토사 『내고장 부산남구, 그 시간의 숨과 결을 느끼다』에도 실었다.
# 이기대는 역사 현장
 그동안 우리 고장의 향토사 연구자들은 임진왜란 이후 400여 년 이상 구전되어 온 이기대의 유래에 관한 자료를 꾸준하게 수집, 채록, 정리해왔다. 이 가운데 용호동과 대연동의 여러 문중 족보에서 이기총 묘역이 성지로 기능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 『내영지』의 이기대 유래를 연결해 보면 이기총은 애국충절의 증표이자 아픈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이제 더는 이기대의 유래와 관련하여 `기생설'이니 `의기대설'이니 하면서 설왕설래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이기대의 유래가 왠지 논개와 닮았군요."라는 말을 듣더라도 예전처럼 눈만 껌벅일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설명한 여러 방계의 자료를 생각하며 이기대 해안 산책로를 걸어보자. 파도에 실려 오는 해조음 속에 400여 년 전 여염집 아씨처럼 살았던 용호마을 두 기생의 화창한 봄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곽태욱 향토사연구가·소설가

이기대(二妓臺) 글자가 새겨진 이기대 해안의 석벽과 두 기생이 일본 왜장과 함께 순절한 곳으로 여겨지는 너럭바위 일대가 장관이다.
1850년 편찬된 내영지에 기록된 이기대 문헌 내용`(二妓臺 在營南 十五里 上有 二妓塚云)(좌수영 남쪽 15리 위에 두 기생의 무덤이 있어서 이기대라 부른다 한다)'
목록

만족도조사 ㅣ 현재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와 편의성에 만족하셨습니까?

  • 5점(매우만족)
  • 4점(만족)
  • 3점(보통)
  • 2점(불만)
  • 1점(매우불만)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