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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더튼 출신의 네 소년을 추억하며)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더튼 출신의 네 소년을 추억하며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21/07/02/ 조   회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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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커트니의
Freedom is not free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더튼에서 온 네 명의 소년들은 이제 모두 사라졌다. 그들의 이름은 주니어 맥칼럼, 이반 맥칼럼, 잭 호프먼, 빌 하웰이다. 당시 인구 1000명이 안 되는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의 소년들이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 소속으로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서약서를 썼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롭다.
 맥칼럼 형제는 늘 얼굴에 미소를 띠고 우애가 좋았다. 형인 주니어는 참전 당시 스무살이었다. 남동생 이반(당시 18세)은 종종 뒷주머니에 책을 꽂고 다녔다. 어느 날 아침 7시쯤 나는 군복과 군화를 착용하고 하루를 준비하던 주니어의 모습이 기억난다. 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건조하고 뜨거운 연기 한 모금 내뱉은 뒤 웃으며 말했다. "아침에 담배를 안 피면 사는 낙이 없어." 다른 세 명보다 진지한 잭 호프만(당시 20세)은 강철 케이블처럼 강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동갑인 빌 하웰은 넷 중 가장 크고 튼튼하면서 제일 다정했다. 주니어 맥칼럼, 호프만, 하웰 이렇게 세 명은 한국으로 향했지만 막내 이반은 나이 제한에 걸려 참전이 불허됐다. 솔직히 말하면, 이반은 나이를 속이지 않았고 나는 내 나이를 4살까지 속여 전우들은 내가 20대인 줄 알고 있었다.
 나는 서부전선의 해병대보다 1마일 후방에 위치한 예비부대에서 그들을 처음 만났다. 우리는 해병대 중기관총이 적에게 퍼붓는 무시무시한 총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이때 갑자기 큰 불이 났다. 중공군의 기관총과 수류탄이 날아온 것이다. 곧이어 미국의 M-1 자동소총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류탄 폭발음이 크게 들릴수록 기관총은 더 길게 불을 내뿜었다.
 나는 이 더튼 출신들과 함께 1마일을 걸어 산을 넘었다. 우리 네 명은 T자형 참호에 몸을 숨겼다. 참호 중앙은 깊었고, 참호 양쪽에 사람 한 명이 겨우 잘 수 있는 선반이 있었다. 참호 위는 텐트 천으로 반쯤 덮여 있었다. 부산 유엔기념묘지에서는 전사한 군인들을 그 텐트 천에 싼 뒤 노란 통신선으로 둘둘 묶어 땅에 묻는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머리 위 텐트 천에 서리가 맺혀 촛불에 반짝였다. 우리의 숨소리가 천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미군 포병부대가 8인치포를 설치한 임진강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대포가 한번 발사하면 뇌진탕에 걸릴 정도로 텐트 천이 요동쳤다. 거대한 포탄은 우리 머리 위로 올라간 뒤 아치를 그리며 적이 있는 고지로 날아가 지축을 흔들었다. 그런데 세 번째 포탄에 드라이빙 밴드(driving band:약실회전구조체로 포탄에 회전력을 주기 위해 포신의 강선과 맞물리게 만든 포탄 표면의 얇고 무른 금속 띠) 일부가 떨어져 나가 끔찍한 굉음이 발생했고 그 때문에 우리는 혼이 나갈 만큼 겁에 질렸다. 자정 무렵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고 며칠 뒤 우리중대는 큰 전투를 치렀다. 그 이후 나는 한국에서 그들을 다시 보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뒤, 나는 온타리오주 액튼이라는 작은 도시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액튼의 주요 산업은 가죽 무두질(가공하기 전의 생가죽을 다루는 공정)인데 도시 전체에서 악취가 풍겼다. 내가 길가에 차를 대자 3m 앞에 빌 하웰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차 앞 유리를 들여다 본 그도 나를 알아보고는 차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한국의 고지에서 이야기를 끝내고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캐나다 참전용사·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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