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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6.25발발 70주년 특집] 피란시절 남구의 기억과 증언 2. 우암동)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6.25발발 70주년 특집] 피란시절 남구의 기억과 증언 2. 우암동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20/04/07/ 조   회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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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시절 남구의 기억과 증언 2. 우암동

 

박 기 줄 1927년 생 - 6·25전후 10년간 우암동 동장 근무

 

"대연동은 평안·강원도, 우암동은 함경도 피란민 정착"

 1945년 해방 무렵 나는 부산시청에 귀환동포환영위원회 업무를 봤다. 귀환동포들이 부산항에 도착하면 우선 영주동에 있는 봉래초등학교에 수용돼 각자 고향으로 가게 하거나 부산에 남고 싶은 이들은 희망하는 수용소로 보내진다. 당시 부산에서 우암동 소막사를 정비해 귀환동포의 일시 정착지로 조성했다. 하지만 소막사 입주 희망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소막사가 다 차지 않아 빈 공간에 닭이나 가축을 키우는 곳도 있었다.
 1951년 흥남부두에서 LST를 타고 거제도에 내린 피란민 가운데 부산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소막사에 수용하기 위하여 재분배했다. 소막사 가운데를 가로로 질러 반을 나누고 다시 양쪽에 3~5평 씩 가족 수 대로 나누었다. 3~7명 가족이 좁은 공간에 지내야 해 부엌과 화장실을 집 안에 두는 것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각 집과 집 사이는 합판 한 장이나 가마니로 가려 프라이버시는 아예 생각할 수도 없었다.
 우암동의 성창목재 쪽 바다와 안골새 등 일대 그리고 문현동 강선대 일대에 굴이 많이 있었다. 그곳은 일제강점기 일본군들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 조성한 포진지나 탄약고였다. 그곳에 일본군이 보물을 숨겨두고 갔다는 헛소문에 보물찾기한다고 난리를 피웠다. 많은 사람들이 보물 노다지에 눈이 멀어 재산을 탕진했는데 지금도 감만동 일대에서 보물찾기를 계속하고 있다 한다.
 감만동의 본 마을은 지금의 우암파출소와 새마을금고가 있는 곳 일대이다. 우암동은 남구에서 유일하게 집성촌이 없는 마을이다. 4~5대를 이어 살았던 집은 없었다. 가장 오랫동안 몇 대 살았던 사람으로 밀양 박씨 한 집 유일했다. 피란민들이 많이 내려오자, 동향인들끼리 모여 지역을 나누어 수용시설을 분배했다. 피란지로 대연초등학교 운동장에 배치된 사람들은 평안도, 강원도 출신이었고 우암동은 함경도 사람들이 주로 분류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소막사 주변 여러 곳에 우물을 파두어 우암동의 귀환동포와 피란민들은 물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우암동 소막사에는 문만 열면 앞집, 뒷집이 안방까지 다 보였으니 마치 한 가족과 같았다. 가난하지만 동향인들이 많아 정을 나누며 살아갔다. 그들은 자주 큰 소리로 싸우기도 했으나 싸움은 칼로 물을 베듯 쉽게 끝나고 오히려 단결력이 강하여 상부상조를 잘했다.
 끝없이 밀려드는 피란민들로 인해 뒤늦게 온 피란민들은 소막사가 다 차버리자 동항성당 뒤편 산자락에 움막 같은 집을 짓고 살았는데, 나중에는 장고개 가는 양쪽 길에도 집들이 차게 되었다. 처음에는 짚이나 가마니로 엮어서 만든 움막이나 널판지와 종이박스 등으로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이었다. 피란민 판자촌 행렬은 후에 소막사와 우역검역소로 올라가는 개천가에도 집이 가득 차게 되었다. 우암동 외 다른 곳도 마찬가지이지만 산의 주인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란민들 은 아무 곳에 집을 지어 살았다. 전쟁통이여서 그런지 아니면 측은지심 때문인지 고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암동은 적산(敵産)으로 분류된 토지가 많은 곳이어서 특히 피란민들이 많이 모여들었던 것 같다. 한국전쟁 발발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소막사의 길이나 우역검역소 올라가는 길에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봄에 장관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부산에서 벚꽃이 가장 화려하게 피었던 곳이 우암동과 신선대의 검역소가 있었던 곳이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소풍을 오기도 했던 행락 장소였다.
 피란민들은 주로 우암부두에 나가서 부두 노동을 많이 했다. 그리고 뒤늦게 감만동 방면으로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성창합판, 대양합판 등 공장에 나가는 이들도 많았다. 감만 본동 쪽에는 `요꼬(실이 좌우로 움직이며 천을 짜는 직물기)'로 양말을 짜는 집이 한 두 곳 생기면서 여자들 절반이 그곳에서 일했다. 전쟁이후 우암동에 피란민들이 많이 들어온 데다 부두에 일거리가 많아 인구가 급증해 남구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이 되었다. 사람이 많아져 우암동 일대에 술집들도 번창했다. 감만동에는 미군이 주둔하는 부대 근처에 미군들을 상대로 하는 윤락가가 생겨났고, 우암동에는 부두에 일하는 사람이나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선술집 형태의 술집들이 번성했다.
 우암동 해안에는 일본군들이 남겨둔 군수 창고가 있어 미군들이 보급품 창고로 사용했는데 이곳에서 군용 워커나 군복을 훔치던 얌생이꾼가 유명했다. 광명목재가 있는 8부두 쪽에 미보급창이 있었는데 몰래 큰 옷을 입고 들어간 얌생이꾼은 나올 때 값비싼 양주 등을 옷 속에 훔쳐 나왔다. 얌생이꾼 가운데 일부는 그 수법이 얼마나 절묘한지 우암선 열차에 싣고 가던 군수품과 타이어 등에 고리를 걸어 바다에 떠 있는 전마선에서 잡아당기면 물건이 쏙 빠져 딸려 나가는 바람에 지키는 사람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우암동에 냉면집이 두 곳이 있었다. 내호냉면과 평양냉면이었다. 강선대 올라가는 쪽에 있던 평양냉면집은 북한에서 공부를 많이 한 할머니가 운영했는데 맛이 좋았다. 할머니는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들었다. 내호냉면은 처음에는 국수집이었다. 당시에 임금 대신 받은 밀가루가 시중에 많이 흘러나왔는데 내호냉면에서는 밀가루에 전분가루를 섞어 부산 특유의 밀면이 나왔다.
증언 채록·정리=공기화 부산교육대 명예교수

1954년 미군이 촬영한 우암동 우암선 철로변에 종이박스로 벽체를 이룬 피란민 가옥들(왼쪽)과 우암동 언덕바지에 설치된 미군의 방공포 진지, 최신 90㎜ M1 대공포들이 여럿 보인다. 사진 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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