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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참전용사 빈센트 커트니 단편소설 <한국과 캐나다를 찬송하며>)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참전용사 빈센트 커트니 단편소설 <한국과 캐나다를 찬송하며>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19/08/01/ 조   회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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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 넘어 어린 막례 앞에 나타난 캐나다 용사들


#1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 막례와 친구들


석포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례는 무척 예쁜 소녀다. 막례는 부모님 그리고 두 명의 남자 형제들과 함께 부산의 멋진 도시 남구의 석포마을에 살고 있다. 막례는 한국이 언제나 훌륭하고 자유로운 국가라고 생각한다. 부산은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그곳에 350만 명이 살고 있는데 캐나다 토론토와 그곳에 가장 가까운 마을 사람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100만 명이나 많다.
 막례는 자신이 사는 부산에 대해 공부했다. 부산이 한국전쟁 중에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도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3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미국 등 유엔에 속한 16개국이 한국을 도왔다는 점도 배웠다. 막례에게 이것은 새로운 사실이었고 그녀는 다음날 아침,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이와 관련된 많은 질문을 해 선생님과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막례는 또 노래를 잘 부른다. 그녀는 학교 가야금 병창단의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가야금을 연주한다. 가야금은 긴 현악기로 바닥이나 마루 또는 테이블 위에 놓고 연주를 한다. 석포초등학교의 음악 교사인 이현주 선생님은 병창단원들을 불러 모은 뒤 특별한 임무가 있다고 설명했다. "캐나다 참전용사 한 분이 6·25에 관한 노랫말을 썼는데 유엔기념묘지 관리처장이신 조병행 대사님이 우리들에게 기념식에서 그것을 노래로 불러줄 수 없겠느냐고 물어오셨단다."
 "그 묘지가 어디에 있어요?" 막례의 친구인 미진이 물었다. "바로 우리 동네 근처에 있어." 이 선생님이 대답했다. 막례도 질문했다. 그녀는 질문할 때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어야 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선생님, 유엔공동묘지란 게 뭔가요?"
 이 선생님은 조금 굳은 표정이 지었다. "전 세계에 단 하나 뿐인 유엔 묘지가 있는데, 바로 여기 부산에 있고 우리 학교와 아주 가까워." "누가 묻혀 있나요?" 막례가 물었다.
 "한국전쟁 때 우리를 구해준 군인들 중 일부가 묻혀 있어" 선생님이 대답했다. "한국전쟁에서 사망 한 대부분의 외국 병사들은 자국에 매장되어있는데, 몇몇 나라들은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이 묘지에 남겨 두었단다."
 "선생님, 우리가 불러야 하는 그 캐나다 참전용사의 노래는 어떤 건가요?" 막례의 친구 미진이 선생님께 물었다. "2000년 동안 한국에서 불린 아리랑 같은 한국 민속 노래야. 그 캐나다 참전용사는 우리가 그 멜로디로 노래 부를 영어 가사를 썼단다. 우리는 단어를 배워 그것들이 운율에 맞고 음악과 잘 어울리게 만들어야 해."
 막례는 불안해졌다. "하지만 선생님, 우리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영어로 노래 할 수 있죠?" 이 말에 선생님이 웃으며 답했다. "캐나다 대사관에서 일하는 어느 한국인 직원이 그 가사를 우리말로 번역해줬지 뭐니. 그 분 이름은 박혜영이야."
 막례는 우리말로 노래할 수 있다는 점에 들떴다. 하지만 유엔공동묘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또 캐나다 군인들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졌다. 여태 그 누구도 캐나다를 포함해 다른 여러 나라의 군인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한국에 왔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례는 마음이 무거웠다. "캐나다 군인들이 한국에 얼마나 오래 묻혀있었죠?" 그녀는 선생님에게 물었다.
 "50년 혹은 그 이상일거야." 이 선생님이 대답했다. "선생님, 그 군인들은 고향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어요?" 막례의 친구가 물었다. 선생님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그걸 알아내 내일 반 친구들에게 말해주면 어떨까?" 한국의 교사들은 학생들이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 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이 선생님이 한국어 가사가 적힌 종이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종이 상단에 `캐나다의 용감한 아들들'이란 제목이 적혀 있었다.


#2 어느 캐나다 참전용사의 꿈


막례와 미진은 집으로 가는 통학버스 대신 유엔묘지로 향하는 시내버스를 탔다. 묘지는 학교 근처에 있었다. 묘지의 큰 출입문을 지날 때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이때 빛나는 검은 차량 한 대가 그들 쪽으로 다가와 멈춰 섰다. 운전자가 내리고 뒷문이 열렸다. 친근한 외모의 한국인 신사가 차에서 내려 자신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의 머리는 은발이었고 멋지고 짙은 파란 정장에 흰색 셔츠에 검고 파란 줄무늬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노 신사는 부드러우면서도 정중한 말투로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꼬마 숙녀들이 여기에는 무엇 때문에 왔을까? 묘지를 방문하러 온 거니?" 그가 물었다. 막례는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저희는 캐나다 군인들의 묘지를 보기 위해 왔습니다." 막례가 말했다. "가족 중에 캐나다 사람이 있니? 아니면 할아버지 중에 캐나다 친구가 있어?" 그가 물었다. "아니요. 저희는 석포 초등학교에서 왔어요" 막례가 대답했다. "저희는 `캐나다의 용감한 아들들'이라는 노래를 배웠어요. 우리가 부를 이 노래에 등장하는 캐나다 사람들이 어디에 묻혀있는지 보고 싶어서 왔어요." 신사는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운전기사에게 차를 주차할 것을 지시했다.
 "나도 그 노래를 알고 있단다." 그가 말했다. "나는 이곳 유엔묘지를 관리하고 있어." 이 말에 아이들은 두려웠다. 아이들은 선생님으로부터 그의 직함이 대사라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대사는 아주 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 대사는 아주 멋지고, 신사적이며 친근한 사람처럼 보였다. 목소리도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내가 용감한 그 캐나다인들이 매장된 묘지를 보여줄게." 조 대사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묘지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묘지 사이에 있지. 터키 군인 묘역과도 가까워." 그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묘지 잔디밭으로 난 산책로로 향했다. 몇 피트 마다 작은 울타리가 있고 울타리 사이 바닥에 청동 명패가 보였다. 무덤을 둘러본 막례는 슬퍼졌다. 묘지는 산책로 옆으로 먼 곳까지 뻗어 있었고 조용했다. 두 꼬마 여자애와 조 대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군인 무덤의 청동명패에 적힌 날짜를 보았다. 그 군인들은 50년 혹은 그보다 오래 전에 묻혀있었다. 조 대사는 막례의 얼굴이 매우 어두워진 것을 알아챘다.
 "군인들 묘지를 보니까 마음이 아프니?" 그가 막례에게 물었다. "네" 막례는 솔직하게 답했다. "이곳은 외로워 보여요. 그들 가족 모두가 수천마일 떨어져 있잖아요. 아무도 이 사람들을 보기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나요?"
 조 대사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끄덕이며 "그래"라고 말했다. "몇몇 캐나다 참전용사들이 매년 한국을 방문하지만 죽은 군인들의 가족들은 캐나다에서 이곳까지 오기는 힘들단다. 너무 먼 여정이야."
 "너무 슬퍼요." 막례의 친구 미진이 말했다. 조 대사는 미소 지었다. "막례와 미진아, 수많은 캐나다 참전용사들도 이곳에 묻힌 전우들을 생각할 때 너희와 비슷한 기분이란다" 조 대사의 설명은 계속됐다. "그들 중 한 명이 몇 년 전에 여기로 왔었지. 그는 전우들의 쓸쓸한 무덤을 보고는 오열했지. 그는 이들을 보기 위해 캐나다에서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 캐나다는 이곳에서 무려 6000마일이나 떨어져 있거든."
 막례가 말했다. 그녀는 조 대사의 이야기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여기까지 왔잖아요. 이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여기서 죽었는데 왜 그 나라 사람들은 이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여기에 올 수 없다는 말씀이세요?"
 조 대사는 그 말에 감명을 받았다. "네 말이 맞아, 막례야. 이 캐나다인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아주 먼 길을 왔지. 우리 국민들은 그들 외에 다른 외국의 군인들에게 아주 큰 빚을 지고 있어."
 "돌아와 울었다는 그 캐나다 참전용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미진이 물었다. 조 대사는 다시 웃었다. "그것이 너희가 그가 쓴 새로운 노래를 배우고 있는 이유다. 그 캐나다 군인은 자신의 동료들 묘지를 표시하기 위해 오로지 청동 동판만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어. 그는 이곳에 그 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는 사람들이 이들이 누구이며 왜 이곳에 왔고 묻혔는지 알기를 원해."
 막례의 마음은 뜰떴다. "그럼 그 분이 쓴 가사에 그런 게 쓰여 있나요?" 그녀가 조 대사에게 물었다. "어떤 면에서는…" 조 대사가 대답했다. "너희는 캐나다 군인들의 영혼에 감사하는 노래를 부를 거야." 그가 설명했다. "그 참전용사는 멋진 청동 동상을 스케치했어. 그 동상은 그가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말해 줄거야. 그것은 캐나다인들이 누구이며 어떻게 생겼고 또 왜 이곳에 왔는지를 말이야."
 "그 동상은 지금 어디 있어요" 막례가 물었다. "그 캐나다인은 유영문이라는 훌륭한 한국인 예술가를 만났지. 그 예술가는 의정부 북쪽에 있는 포천시에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는데 그 예술가와 캐나다인은 그곳에서 함께 작업을 하고 있어, 그의 아이디어를 멋진 청동 동상으로 바꾸고 있지."
 "그럼, 언제 이곳에 오나요?" 이번에는 미진이 조 대사에게 물었다. "너희가 `캐나다의 용감한 아들들'을 부르러 이곳에 오는 10월 쯤 그 동상을 볼 수 있을거야." 막례는 자신이 이 용감한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마음 속으로 느꼈다. 그녀는 이전에 불렀던 그 어떤 노래보다 더 잘 부를 것이다. 그녀는 12줄의 가야금을 이전에 했던 그 어떤 연주보다도 더 잘 연주할 것이다. 그녀의 친구 미진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간 조 대사는 몇몇 아이들의 부모들이 차를 몰고 묘지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학교에서 노래 연습을 마친 자신들 딸들을 데리고 캐나다 묘역을 둘러봤다. 얼마 안돼 가야금 병창단의 모든 소녀들이 유엔묘지를 찾게 됐다. 아이들은 이제 노래와 가야금 연주에 있어 자신들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줄 마음의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조 대사는 소녀들과 그 부모들의 이런 관심에 감명을 받았다. 그들 중 몇몇은 그의 사무실로 와 캐나다에 관한 책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그들 부모에게 부산의 캐나다 영사관을 방문할 것을 권유했다.
 캐나다인이 작곡한 노래에 대한 단어만 배우지 않고 병창단의 대부분은 소녀들은 캐나다에 대해서도 배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캐나다 영사관에서 책을 얻는가 하면 몇몇은 서울에 있는 캐나다 대사관으로부터 우편을 통해 얻기도 했다.
 막례는 캐나다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캐나다 사람들이 왜 한국전쟁에서 숨진 수백 명의 자국의 군인들을 한국에 남겨두었는지가 이해되질 않았다. 이 것이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다. 캐나다의 웅장한 시골과 산, 협곡, 강, 드넓은 평원을 보여주는 그림책들을 보면서 막례는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 깊은 슬픔이 찾아왔다. 어린 한국의 소녀가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캐나다의 그런 장소들을 이렇게 가보고 싶어하는데, 전쟁에서 숨져 간 캐나다 군인들은 그 장소로 얼마나 돌아가고 싶어 했을까.


#3 말벌의 독침이 과거로의 여행을 돕다


마침내 병창단이 유엔기념묘지에서 공연하는 날이 밝았다. 막례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화장을 했다. 석포초등학교 가야금 병창단 단원들은 10살, 11살 어린 학생들이지만 공연을 위해 블러쉬, 아이 섀도우, 립스틱을 바르는 것이 전통이다. 막례는 행복감으로 충만했다. 그녀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부드럽게 노래했다. 막례는 한국어로 그 시를 완벽하게 노래 할 수 있어 자랑스럽고 기뻤다. 그녀는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발에서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풀밭에서 앉은 큰 말벌을 밟은 것이었다. 그녀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고 주저앉았다. 이번에 말벌은 여러 번 그녀의 손을 찔렀다. 그녀는 잔디 위에 구르며 울었다. 고통은 끔찍했고 마치 뜨거운 바늘처럼 타 올랐다. 발과 발목이 부었고 눈물에 화장이 번졌다.
 막례는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말벌 독이 들어간 발목과 손이 퉁퉁 부어올랐다. 이대로는 가야금 연주는 불가능해 보였다. 부어 오른 손가락으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제 그녀는 용감한 캐나다인들을 위해 노래하거나 연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례는 입술을 깨물었고 눈물을 참았다. 그 순간 오래전 한국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캐나다 군인들이 있던 그 때의 한국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나무가 거의 없었다. 그늘이 없어 잔디는 태양에 의해 갈색으로 말랐다. 높은 언덕에서 먼지가 불어왔고 고지대에는 바위만 보였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좁은 도로를 제외하고는 포장도로는 없었다.
 막례는 논 너머로 캐나다 군인들의 행렬을 보았다. 그들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진흙 제방을 따라 걸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그들의 발도 막례처럼 다쳐 있었다.
 군인들의 얼굴에는 온통 흙이 묻어 있었다. 막례와 친구들처럼 멋진 비단옷을 입지 않고 누더기 같은 낡고 더러운 옷을 걸치고 있었다. 옷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크게 찢어진 곳에는 가는 노란색 전화선으로 꿰매 놓았다. 어떤 군인은 땀으로 얼굴이 범벅이 되어있고 어떤 이는 눈물 때문에 얼굴이 얼룩져 있었다.
 막례는 자신의 고운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눈물을 참았다. 그녀는 그 용감한 사람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되겠다고 결심했다. 말벌 따위가 캐나다의 용감한 아들들을 위해 노래하는 걸 막지는 못할 것이다. 막례는 서있기 조차 힘들었지만 노래하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한국의 소녀들과 여성들은 가운 형태의 한복을 입는데 한복은 실크로 만들어져 아름답고 형형색색의 자수가 놓여진다. 또 천으로 만든 큰 부츠를 신는데 그걸 꽃신이라고 부른다. 꽃신은 막례의 부어 오른 발을 잘 가려줬다. 또 심하게 부은 손은 실크 손수건으로 감췄다. 막례는 용감하게 고통에 맞섰다. 유엔묘지에서 병창단원들은 잔디밭에 방석을 깔고 앉은 뒤 무릎에 가야금을 올려 놓았다. 음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12줄을 조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어린 막례의 손은 부어올라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가야금 현을 조율하는 일은 특히 어려웠다.


#4 가을 하늘에 울려 퍼진 캐나다의 아리랑


그날 유엔묘지에는 200여 명이 모였다. 조 대사와 데니스 꼬뮤 캐나다 대사도 함께 했다. 청동으로 제작된 기념 동상은 캐나다 묘역에 자리 잡았고 그 옆으로 막례와 미진 그리고 병창단원들이 있었다. 캐나다 대사는 연설에서 유엔기념묘지에 묻힌 몇 명의 캐나다 병사에 관해 언급했다. 대사는 그들이 한국에서 전사한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를 설명했고 자신과 캐나다 사람들 모두가 이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이윽고 조 대사가 병창단에게 가야금을 연주를 시작할 것을 손짓했다. 병창단은 처음에 아리랑 노래의 일부를 연주 한 뒤에 `용감한 캐나다의 아들들'을 합창했다.
 햇빛이 점점 강하게 내리쬐었다. 막례는 햇빛과 몸에 스며든 독 때문에 땀이 났다. 하지만 막례는 용감하게 가야금을 켰고 고통이 그녀의 연주를 방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 대사와 꼬뮤 대사의 모습이 갈수록 흐릿해지고 뜨거운 느낌 대신 추워지기 시작했다. 천으로 가린 기념 동상 앞에 앉아있는 관객들의 모습도 흐릿해 보였다.
 막례는 여태 기절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어쩌면 지금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직감했다. 그 때였다. 어느 젊은 청년이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묘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렴풋하게 보였는데 그의 모습만큼은 선명했다. 그는 갈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팔에 빨간 단풍 잎 배지를 달고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작은 배낭을 메고 있었다.
 막례는 자신이 지금 연주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호했다. 자신이 기절을 해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여겼다. 그 청년이 막례 옆에서 무릎을 꿇고는 그녀의 아프고 부은 발을 만졌다. 그러자 그의 손이 꽃신을 통과해 막례의 발에 닿았다. 그는 벌독이 나오도록 부드럽게 발을 마사지했다. 그는 막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 댔다. 막례는 매우 무서웠다. 그의 심장은 마치 얼음처럼 차가웠고 그 냉기가 막례의 팔을 타고 내려왔다. 그러자 막례의 심장이 서늘해졌고 잠시 후 흐르던 땀이 멈췄다. 그녀를 돕던 남자가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모습이 점차 또렷하게 들리고 보이기 시작했다.
 막례는 강렬하고 용감하고 강하게 노래하는 자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캐나다의 용감한 아들들이여,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있어요. 모든 평온한 날에, 당신이 잠든 그 곳에 축북을 내려 주소서."
 그것은 분명 막례 자신의 목소리였다. 막례는 먼 과거로부터 캐나다 군인이 자신을 만나러 온 것과 한국을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친 그들을 떠올리니 와락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참고 울음과 맞섰다. 그 날의 영예로운 손님들을 위해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막례는 관객들 너머로 방금 자신을 도와 준 갈색 군복의 그 청년을 보았다. 그는 조금씩 멀어져 갔고 흐릿해졌다. 그의 팔에 있는 붉은 단풍잎이 보였다.
 막례는 젊은 캐나다 대사가 마이크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대사 앞에는 나무 스탠드가 있었다. 그 캐나다 대사는 병창단이 노래하는 동안 눈물을 흘렸다. 또 네 명의 캐나다 참전용사들도 거기에 있었는데 그들 역시 눈물을 흘렸다. 막례가 가야금을 켜자 말벌에 쏘인 손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원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연주했고 아리랑의 여러 부분를 끝내고 다시 합창을 시작했다.
 노래가 끝날 무렵 새들이 나무 위에서 울어댔다. 사람들 위의 새떼들이 날아갔다. 막례와 친구들은 유엔묘지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이때 막례와 미진 그리고 단원들은 관객들 사이에서 다른 누군가를 보았다. 그것은 오래된 갈색 군복을 입은 수많은 캐나다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수십 년 간 말을 하지도 미소도 짓지 않은 것처럼 피곤하고 마른 표정이었는데 이들이 서서히 미소 짓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캐나다 방문객들과 함께 걸어 다녔다.
 군인들은 막례, 미진과 다른 병창단원들에게 걸어왔다. 막례는 늦은 아침 햇볕에 땀을 흘렸다. 군인 중 한 명이 막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실크 손수건을 풀어 그것으로 막례의 이마를 닦아줬다.
 막례가 눈이 휘둥그래지자 어느새 군인들은 모두 사라졌다.막례는 미진을 향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들을 봤어?, 용감한 캐나다인들이야." 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봤어." 또 다른 친구 영주가 말했다.
 막례가 이 선생님에게 물었다. "캐나다 군인들이 우리 노래를 들었을까요?" 막례는 말벌에 쏘여 심하게 부은 발이 멀쩡한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럼 막례야." 이 선생님은 대답했다. "나는 그들이 들었을 거라고 확신해."


#5 마침내 고향에 온 용감한 캐나다의 아들들


그일이 있고 2년이 흘렀다. 막례와 친구들은 그때보다 성숙해졌다. 어느 날 아주 특별한 소식을 듣게 됐다. 이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캐나다의 용감한 아들들을 한 번 더 불러보면 어떨까? 캐나다에서 행사가 있는데 현대자동차에서 우리 모두를 캐나다로 보내주기로 했단다." 캐나다를 눈으로 보고 싶어 한 막례의 꿈이 예상보다 일찍 실현됐다. 캐나다 재향군인회에서 비용을 대 캐나다 기념동상을 하나 더 만들도록 주문했고 캐나다 정부는 이 두 번째 기념비를 매주 수 천명이 찾는 캐나다 수도 오타와의 연방공원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막례는 너무도 기뻤다. 이제 캐나다 사람들도 캐나다의 용감한 아들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생겼으며 왜 한국에 갔고 한국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더 이상 유엔기념묘지에 묻힌 캐나다인들을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석포초등학교 병창단은 오타와 공연에 앞서 캐나다 총리, 캐나다 유산장관, 보훈처장, 국가방위상, 캐나다 주재 한국대사의 영접을 받았다. 그 가을날 캐나다에서 노래할 때 막례와 미진은 하늘을 올려 봤다. 나무 위의 넓고 푸른 단풍잎 사이로 환한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캐나다의 용감한 아들들이 자신들의 고향집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들 눈에는 유엔기념묘지의 378명과 한국의 또 다른 곳에 묻힌 16명의 캐나다 군인 그리고 전쟁 때 바다에 묻힌 선원 5명과 일본 요코하마의 묘지에 잠든 20명 이상의 캐나다 병사들까지 캐나다의 용감한 아들들 모두가 마침내 집으로 오는 것이 보이는 듯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너무도 멀고 너무도 긴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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