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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참전용사 미망인〈 프랑스 니콜 베나르 여사 〉과 한국아들〈 대연동 주민 이명래씨 〉의 특별한 인연)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참전용사 미망인〈 프랑스 니콜 베나르 여사 〉과 한국아들〈 대연동 주민 이명래씨 〉의 특별한 인연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19/06/29/ 조   회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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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 베나르 여사는 지난 2015년 5월 유엔기념공원 첫 번째 사후안장자로 묻힌 프랑스 참전용사 레이몽 베나르 씨의 부인이다. 남편 유해 안장 이후 매년 5월이면 프랑스 가족과 함께 남편의 묘역을 살피러 이역만리 남구를 찾고 있다.
 대연동 주민 이명래씨(한국자산관리공사 선임위원)는 2016년 이들 가족에게 숙소를 무상 제공해 준 인연으로 니콜 여사와 국경과 세대를 넘어 `프랑스 엄마'와 `한국 아들'로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88세인 니콜 여사는 남편 곁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유엔기념공원으로부터 사후 안장을 승인받았다.


 3년전 숙식 제공 계기 가족 이상으로 발전
 88세 노구에 올해도 어김없이 남구 방문
"남편 옆자리 묻어 주오" 절절한 순애보


 나비 닮은 호접란이 3년째 꽃을 피웠다. 올해도 때마추어 그 주인이 찾아왔다. 프랑스에서 또 한분 나의 어머니가 부산에 오셨다. 이 꽃을 안겨주고 간 분이다.
 5년 전 그녀의 남편 레이몽씨가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6·25 참전용사로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가족들에게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전사자가 아닌 전후 생존 사망자의 유엔공원 안치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식들은 유엔 회원국의 동의를 얻어 아버지의 유언을 지킨 것이다. 2016년 5월, 레이몽씨 추모 1주기 때 인터넷을 통해 그 가족들은 유엔기념공원 근처에 방을 찾고 있었다. 아무 조건 없이 그 가족들을 우리집에 묵게 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역만리 먼 길 탓일까, 레이몽씨의 묘역에서 그 가족들은 차마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다. 우리가 수시로 찾아뵙겠다고 위안을 드렸다. 젊은 시절 중풍으로 생모를 여읜 상실감에 중국으로 한의학공부를 다녀온 필자에게 또 한분의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퇴근길 나의 장미 한 송이에 푸른 눈 어머니의 포옹은 참 따사했다. 파리로 떠나던 길 어머니는 그 장미를 묘비 앞에 내려놓고 우리에게 은색화분의 나비꽃을 안겨주었다.
 그 양란이 꽃을 피워내던 지난해 이 맘때였다. 핸드폰 너머로 호텔 프론터에서 프랑스 할머니와 중년 딸이 나를 찾는다고 알려왔다. 고인 된지 4년 레이몽씨의 생일을 맞아 부인인 니콜 여사가 온 것이다. 그 전에 우리 가족이 파리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 그녀는 부산 식구들을 한번 더 보겠다고 공항버스로 다시 찾아왔다. 그때 기내서 읽은 편지의 감동은 아직도 내 가슴에 줄을 그으며 비행하고 있다. "내 남편 레이몽은 조국이 두 개다. 그는 의리있고 따뜻한 한국인들의 품에 영원히 잠들고 있다."
 그전부터 한 달이 멀다하고 어머니는 우리에게 손 편지를 보내왔다. 그때마다 따로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적었다. 그 사부곡(思夫曲)의 절정을 지난 방문 때 보았다. 본인도 꼬레아에 남편과 잠들겠다 신청하는게 아닌가. 돌아가는 걸음걸이가 바람에 흔들릴듯해 노파의 부산 방문이 생전에는 마지막이겠구나 여겨졌다.
 그런데 올 초 이 꽃이 다시 피었다. 혹시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파리의 어머니가 또 오셨다.
 이번에는 공항 문이 열리자 휠체어로 모습을 보였다. 88세 연로하신데다 관절수술을 하여 둘째딸과 지팡이에 의존해 겨우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런데 호텔에 도착하자 여정에 없던 큰딸과 외손자가 보이는 게 아닌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하는 백발노모의 커진 눈동자와 홍조띤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연로한 어머니의 해외나들이에 그 여독을 들어드리려고 가족들이 하루 먼저 와서 기다린 것이다. "나를 낳아준 부모는 세상에 다시는 없는 분들이다" 한 달 전 레이몽씨를 찾은 둘째아들이 남긴 한마디와 이번 가족들의 연출은 마치 단추를 제구멍에 끼우듯 꼭 맞았다.
 첫 부산 방문 때 아내가 큰방에서 한복을 꺼내왔다. 나에게는 품이 좀 커던차 프랑스의 중년 아들에게는 꼭 맞았다. 귀국길 서울시내에서 두루마기로 수많은 인파의 눈길을 끄는 사진을 보내왔다. 뿐 아니라 소장하던 레이몬드씨의 100여점 유품을 전쟁기념관에 기증하던 기사도 보았다. 그 유품들이 유엔평화기념관에 공유되어 있다. 기부자들의 명단이 영예의 전당에 올라있고 레이몬드씨 이름이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남편의 이름을 어루만지는 어머니가 언제까지 이런 모습으로 찾아올까 나의 속내를 알아 차린 걸까. 우리집에 들어서자 하얀 실내화를 내어놓으며, "다시 오마" 방점을 대신했다. 두 짝 모두 끄트머리에 당신의 이름이 적힌 것이다.
 파리의 어머니는 17세 때 세살 많은 남편과 약혼하였다. 직업 군인인 아버지로 부터 그 책무를 익히 들은 그녀는 그해 남편의 한국참전에 동의했다. 전쟁 후 부부가 65년을 행복하게 지내다 남편이 고인 된지 5년째, 아직도 남편을 못 잊어 아픈 다리를 어루만지며 11시간 비행을 견뎌 찾아온 것이다. 지고지순한 부부애가 하늘에 닿은 걸까. 눈부시게 주인의 행차를 알렸던 나비꽃이 이런 순애보를 알고 있은 것이다.
 이명래(한국자산관리공사 선임전문위원· 부산남구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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