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특집

home 부산남구신문 > 기획·특집
  • facebook
  • twitter
  • print
기획·특집 (45년간 백운포에 방치된 안성녀 여사)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45년간 백운포에 방치된 안성녀 여사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19/04/03/ 조   회 383
첨부파일 L20050801_22001215719i1.jpg (89 kb)

45년간 백운포에 방치된 안성녀 여사


▲ 1951년 부산 중구 중앙성당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의 둘째 아들 준생 씨의 장례식 사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안성녀 여사다.


일제 보복 피해
35년간 만주 등 떠돌아

안중근 두 살 아래 여동생
하얼빈 의거로 중국 망명
해방 맞아 35년 만에 조국 행
6·25로 부산 피난 와 별세

 지난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국권이 회복되는 날 고국으로 반장해 달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안 의사의 유해는 행방을 알지 못해 그의 묘는 남과 북 어디에도 없는 실정이다.
 이에 반해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안성녀(安性女) 여사의 묘가 백운포 천주교공동묘지에 방치된 지 45년이 되었다. 독립운동의 `객관적 물증'이 없어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현충원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어서다.
 1881년 태어난 안성녀는 오빠 안중근보다 두 살 아래로 안 의사가 하얼빈 의거을 일으키자 일제의 보복을 피해 중국으로 도피했다. 1921년 함께 망명길에 오른 남편 권승복 선생이 숨지면서 타국 생활은 더욱 힘겨워졌고 일제의 눈을 피해 어린 외아들 권헌을 데리고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신민부(新民府)의 본부가 있던 중국 길림성 인근 석두하자(石頭河子)로 피신해 오래 시간 머물렀다.
 아들 딸린 어머니이자 미망인으로 안 여사는 군복 수선이나 독립자금 모금, 문서 전달 같은 방식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다고 한다. 일본 헌병에 끌려가 독립군의 은신처를 대라며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유랑생활 도중 중국 북경에 도착했을 때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이 왔다"는 소식을 접한 중국 관료가 가족이 정착해 생활할 수 있도록 인쇄소와 양재점을 무상으로 차려주기도 했다. 인쇄소를 운영하며 생활하던 중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해방소식을 접한 안 여사는 그 즉시 모든 것을 뒤로하고 가족을 데리고 부산행 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아들 내외와 손자 권혁우(75·현 광복회 부산남부연합지회장)를 데리고 35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다.
 흩어졌던 가족을 만나기 위해 부산을 거쳐 서울로 간 안 여사는 김구 선생의 도움으로 서울 쌍림동에 거처를 마련했지만 6·25가 터져 부산으로 피란을 내려 왔다. 부산시의 도움으로 영도구 신선동에 거처를 마련해 생활하다 1954년 4월 8일 지병과 노환으로 숨을 거둔다. 유족들은 인근 청학동에 여사의 묘를 세웠는데 그 자리에 부산체육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1974년 이곳 용호동 천주교공동묘지로 옮겨 왔다.
 여사가 세상을 뜬지 65년, 용호동 천주교묘지에 묻힌 지 45년이 흘렀다. 지금에 와서 그의 독립운동을 밝혀줄 자료가 새삼 나올 리 만무하다. 안 여사의 독립운동은 2006년 숨진 며느리 오항선 여사(1910.10∼2006.8)가 했던 일부 증언이 전부인 실정이다. 오항선 역시 일제강점기 김좌진 장군 밑에서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한 이름 높은 애국지사다. 여성으로 드물게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돼 현충원에 안장됐다.
 안 여사의 항일운동 여부를 떠나,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일제의 보복을 피해 일평생 낭인처럼 타국을 유랑하며 고된 삶을 살아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총칼로 항거하는 것만이 독립운동이라 단정할 수 없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항일운동의 개념을 좀 더 넓게 보는 국가보훈처의 전향적인 자세가 대단히 아쉽다.



목록

만족도조사 ㅣ 현재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와 편의성에 만족하셨습니까?

  • 5점(매우만족)
  • 4점(만족)
  • 3점(보통)
  • 2점(불만)
  • 1점(매우불만)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