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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남구 명예구민 영국군 참전용사 제임스 그룬디 강연회)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남구 명예구민 영국군 참전용사 제임스 그룬디 강연회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19/05/02/ 조   회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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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 명예구민 영국군 참전용사 제임스 그룬디 강연회

남구 명예구민 영국군 참전용사 제임스 그룬디 강연회

"한국의 내일을 위해 우리의 오늘을 바쳤습니다"


 의무(duty), 영광(honor), 사랑(love). 우리가 살면서 꼭 가져야 할 세 가지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이 세 가지 가치를 주제로 몇 가지 일화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1951년 2월 처음 한국에 도착한 저는 시신수습팀에서 복무를 시작했습니다. 영국에서 장례 관련 일을 했던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임무는 전장에 남겨진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해 유엔기념공원으로 안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신수습팀에서의 근무 첫날, 시신을 찾기 위해 부산에서 대구로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잠시 들른 곳에서 열 살 가량의 한 소녀가 저에게 사과 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 자신도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건네 준 소녀의 마음이 예뻐서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날은 날씨가 아주 추웠는데 그 남자는 나무에 몸을 의지한 채 거의 얼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에게 따뜻한 음료를 주고 담요를 덮어준 뒤 대구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대구에서 작전을 마치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왠지 모르게 그 두 사람을 또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을 만났던 그 일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종종 악몽을 꾸고 땀에 흠뻑 젖어 깰 때가 있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더 해줄 수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전쟁에 대한 악몽은 시신을 수습하면서 더욱 커졌습니다. 사망한지 3∼4개월이 지난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여러분께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었습니다. 3명의 시신을 수습하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시신을 수습하고 나면 신원 확인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날은 3명의 신원을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군번줄과 군인수첩의 이름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엉망진창이었던 전쟁통에 뒤섞였나 싶기도 하고 누군가 바꿔놓은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결국 신원을 알아내지 못한 채 그 3명은 유엔기념공원에 무명용사로 안장을 했습니다. 그때 겨우 19살이었던 그 군인들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습니다.

 시신수습 작업을 하다보면 화나고 슬픈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전우들의 이름을 찾지 못한 채 안장을 하는 날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칠 때면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시신수습을 하는 일은 저의 책임이자 의무였기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신 수습이 한층 수월했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땅이 얼어 파기 어려운 겨울보다는 봄과 여름이 수월했습니다. 특히 논에 시신이 많았는데 논 중에서도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곳을 파면 시신이 있었습니다. 이럴 때는 쉽게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지만 아이러니한 마음이 들곤 했습니다.
 이렇게 시신수습팀에서 복무하는 동안 약 90구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힘들었지만 자랑스럽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지만 한국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들은 여러분께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을 것입니다.
 "For your tomorrow we gave our today."(여러분의 내일을 위해, 우리의 오늘을 바쳤습니다.)

 1953년, 남과 북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전쟁이 끝났습니다. 참전한 군인들은 모두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지금까지도 결코 전쟁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잊지 못한다는 것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전쟁 중 겪은 끔찍한 일들이 떠올라 매일 악몽을 꿉니다. 신체적인 부상으로 평생을 고생하고 있는 이들도 많습니다.
 한 예로, 한국전쟁 마지막 전투에 참여한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제 친구 `존 골드'는 옆구리에 총알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존의 아내 `베로니카'는 62년간 매일 낮과 밤에 각각 4번, 2번씩 상처 입은 부위를 소독해주며 살아야 했습니다(2015년 존 골드 사망, 남편 사망 후 5일 후 아내 베로니카도 운명).

 얼마 전 12∼14세 소녀들이 다니는 영국의 한 학교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강연 중 한 소녀에게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전사했나요?" `정확하게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100만 명은 되지 않을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소녀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럼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죽었나요?" 안타깝게 이 질문에 저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군인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되고 있지만 시민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비교적 언급이 적다는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라도 한국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희생됐는지에 대해 공부하고 조사를 할 계획입니다.

 강연을 시작하며 의무, 영광, 사랑 이 세 가지 가치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군대에서 복무를 할 때, 회사에서 일을 할 때 등, 어떤 위치에서 어떠한 일을 하던 간에 여러분 마음 속에 항상 이 세 가지 가치를 꼭 지니고 살아가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 강연 이후 질의·응답

 #질문1: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조사과장입니다.60년 전 한국을 위해 싸우고 희생하신 분들을 수습하고 유엔묘지에 신원확인도 못한 채 매장했다는 얘기에 가슴이 먹먹하고 그때의 고충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강연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국방부 유해발굴단)도 그때 희생자들의 유해를 찾기 위해 전국방방곡곡을 다니고 있습니다. 혹시 그때 국군이나 유엔군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장소를 말씀해 주시면 저희들의 중요한 단서가 되어 유해를 찾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답변:(구체적) 장소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4∼5명의 시신이 남겨진 장소가 있었는데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시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고, 3개월 뒤 그곳에 다시 갔더니 시신은 없고 옷가지와 부츠 등만 남아있었습니다. 대구∼서울지역, 서울∼가평 및 그 위쪽 지역 수습팀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유해발굴 지역에 관해 언제든지 이야기할 용의가 있습니다. 한국을 찾아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질문2:내년에도 남구를 방문할 계획이 있으시면, 제가 따뜻한 차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답변:재미없는 영국 유머를 하나 말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알고지낸 어떤 여성분과 있었던 실화입니다. 그 여성으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아 호텔로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식사를 하고 나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식사 비용을 제가 냈습니다. 초대를 하신다면 꼭 도망가지 마시고 먼저 지불을 해주시기 바랍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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