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특집

home 부산남구신문 > 기획·특집
  • facebook
  • twitter
  • print
기획·특집 (영국군 참전용사 윌리엄 스피크먼 유엔기념공원 영면)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영국군 참전용사 윌리엄 스피크먼 유엔기념공원 영면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19/02/28/ 조   회 407
첨부파일 9-1.png (1626 kb)

영국군 참전용사 윌리엄 스피크먼 유엔기념공원 영면

고단한 삶 끝내고 남구에 잠든 전쟁영웅

중공군과 육박전, 영국 최고 영예 빅토리아 훈장 받아
전쟁영웅 불구 생활고 등 시달려 … 훈장 내다 팔기도


 `영웅'의 안장식이 열리던 시각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뚝 그쳤다. 지난 19일 유엔기념공원에서 영국군 참전용사 윌리엄 스피크먼(1927.9∼2018.6)씨가 유가족과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었다. 스피크먼씨는 지난해 6월 22일 90세 일기로 영국 런던의 왕립첼시병원에서 운명했지만 고인의 뜻에 이날 유해는 그가 목숨 걸고 지켜낸 한국에 묻혔다. 그는 유엔기념공원에 묻힌 7번째 사후 안장자다.
 스피크먼은 6·25 참전 유엔군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영국 체셔주(잉글랜드 중부)에서 나고 자란 그는 1951년 근위 스코틀랜드 수비대 소속 이등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키가 2m에 육박하는 구척장신으로 동료들은 그를 `거대한 빌(Big Bill)'이라 불렀다.
 그해 11월 4일 임진강 유역 후크고지 전투에서 그는 `불멸의 전설'을 만들었다. 중공군의 기습으로 고지가 넘어갈 위기에서 그는 동료 6명과 함께 전투복에 수류탄을 가득 채운 뒤 중공군 진지로 뛰어들었다. 부대의 후방 철수를 위해 다리에 심한 총상을 입었지만 수류탄을 투척하며 버텼고 수류탄이 바닥나자 주위에 떨어진 빈 맥주병을 던지며 버텨 훗날 `맥주병 VC'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부대원들이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영국 정부는 그에게 영연방 최고 무공훈장인 빅토리아 십자훈장(Victoria Cross)을 수여했다. 영국 정부가 참전용사 중 4명에게만 준 훈장이며 지금의 엘리자베스 2세가 여왕 등극 후 처음 수여해 그 의미가 특별하다. 그의 고향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다리가 세워지기도 했다.


 #알려지지 않은 영웅의 고단한 삶
 다리 부상으로 영국으로 돌아와 카퍼레이드를 가지는 등 영웅대접을 받았지만, 내성적인 성격탓에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귀국 1개월 만에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휴전협정 때까지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뒤 안타깝게 전쟁 영웅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스피크먼은 1968년 술집에서 만난 한 여성의 지갑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104파운드를 훔친 혐의로 체포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22년간 몸 담았던 군대를 떠나게 된다. 그 후에도 민간인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그러는 동안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이 무렵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수집상에게 1500파운드의 헐값에 팔아버렸다. 2013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 `전설을 넘어(Beyond The Legend)에 따르면 당시 1500파운드는 지금 가치로 2만2000파운드 가량 되는데, 그가 판 빅토리아 훈장은 현재 35만 파운드(한화 5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민을 떠난 뒤 말년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요양원이 왕립첼시병원에서 생활했다. 국가보훈처의 재방한 프로그램으로 2010년을 시작으로 한국을 4차례 방문했고 한국의 발전상과 참전용사들에 우호적인 한국인에 감동 받아 사후에 한국에 묻히기를 희망했다. 2015년에는 우리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최고의 태극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목록

만족도조사 ㅣ 현재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와 편의성에 만족하셨습니까?

  • 5점(매우만족)
  • 4점(만족)
  • 3점(보통)
  • 2점(불만)
  • 1점(매우불만)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