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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감만동 동항초등학교 개교 100년)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감만동 동항초등학교 개교 100년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19/04/03/ 조   회 804
첨부파일 동항초1.jpg (281 kb)
동항초2.jpg (216 kb)

감만동 동항초등학교 개교 100년

감만동 동항초등학교 개교 100년

▲ 1951년 미군이 촬영한 동항초등학교와 감만동 일대. 아래 사진은 현재의 동항초등학교.


신교육 필요성 깨달은 마을 주민들이 설립
주민들이 모래 운반해 한옥 교실 직접 건축
6·25때 미군부대·피난민에 교사 내주기도


 감만동 동항초등학교가 4월 1일로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1900년대 남구는 농어촌지역으로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소외된 지역이었다. 부산북항 동쪽 해안가에 위치한 감만동은 1650년 무렵 형성된 마을이다. 감만본동에는 주민들이 세운 초등교육기관으로, 1911년 당시 일제의 설립인가가 난 석남서당이 최영 장군 사당인 무민사 근처에 있었다. 여기서 한문의 초보와 습학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 후 서양 신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이곳 선각자 김상갑, 김은술 선생 등의 제안으로 4개월간 동네유지들을 설득해, 1919년 4월1일 4년제(1928년 6년제로 바뀜) 근대교육기관인 사립 배영의숙이 설립되었다. 동항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역사는 1919년 조선인이 세운 이 배영의숙부터 시작된다.
 당시 주민들이 직접 해안가 모래구찌에서 모래를 운반해 와 한옥으로 교실 1실을 지었으며 나중에 교실 1실을 더 만드는데 당시 비용으로 `1,000원'이 소요됐다. 한옥으로 지어진 건물로 멋있었다고 한다. 위치는 지금 동항초운동장 일부와 감만주차장 자리(옛 교장사택부지)이다. 교육과정은 수신, 조선어 및 한문, 일본어, 산술, 이과, 창가, 체조, 도화 등이다. 졸업생을 1회부터 15회까지 배출하였으며 20년간 운영되었다. 이 학교 13회 졸업생인 박상수씨는 1935년 졸업할 당시 남학생 7명, 여학생 2명 등 졸업생수가 9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립학교이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나 통제가 있었지만 감만동 뿐만 아니라 문현, 용당, 우암, 용호동에서 걸어다니는 학생들도 있었다하며 학비는 월 80원 정도로 그 당시 비싼 학비였다고 한다. 졸업생인 장계근씨(1920년생)는 배영의숙 교가(작사 전윤영, 작곡 김명술)를 기억하고 있었다. 가사는 이렇다. 대조선 남단에 비춰온 이곳/ 뒤에는 부산이요 앞에는 동해라/ 이땅에 터 닦아서 세운 이집은/ 배달의 귀한 자녀 길러낸단다/ (후렴) 동무야 사리차고 일어나거라/ 동무야 노래불러 축복합시다/ 배영배영 만만세 축복합시다(1절)
 1936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南次郞)는 조선 미나미 총독은 조선인을 일본인화하는 황국신민화정책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선인교사가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것을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조선인이 세운 사립학교를 폐교시키고 졸업대장도 남기지 않고 공립으로 전환시켰다. 1939년 일제에 의해 배영의숙이 폐교되고 그 건물에 일본인에 의해 부산진공립심상소학교 적기분교장이 설치, 운영되었다.
 1942년 4월 1일 일본인이 지은 2층4교실로 된 신축건물에 6년제 부산적기공립국민학교로 4학급을 편성하여 개교하였다. 본교 7회 졸업생인 장성줄씨는 당시 수업시간에는 일본말로 했으며 학교 선생님은 전부 일본인이다. 그리고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반씩 편성되었다. 직접 만든 짚신을 신고 다녔으며 일본글로 된 책 1∼2권을 천조각으로 말아가지고 다녔다. 그 당시 용호, 용당, 우암, 감만 4동네 또래가 다 모였다고 한다.
 1945년 9월 해방직후 2대 최현국 교장이 부임하여 부산동항공립국민학교로 개칭하고 8학급을 편성하여 운영하였으며 1950년 부산동항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동항국민학교 6교실에는 미군부대가 들어섰고 나중에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군부대는 학교를 피난민에게 내어주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먼저 온 피난민들은 교실을 차지하고 나중에 온 피난민들은 종이나 헝겊으로 만든 텐트로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1951년 3월 가교실 6동을 확보하여 피난학생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돌산건설국창고를 5교실로 개조하여 본교생 교실로 활용하였다. 신선대분교실과 우암분교실은 서울 서강피난국민학교에 빌려주었다.
 이 시기에 유엔군으로 참전한 미군 케네스 레(Kenneth H. Lehr) 씨가 찍은 감만동을 배경으로 한 귀중한 칼라사진이 2011년도에 공개되어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었다. 피난민 정착과 도시화, 산업화로 인한 인구증가로 1959년 우암초등학교, 1965년에는 용당국민학교로 분리, 개교하였다. 1966년 석포국민학교로 5학급이 분리되고 1982년 동천국민학교가 16학급으로 분리, 개교하였다. 2014년 동항역사관 개관 및 향토지 `아름다운 감만동'을 발간하였고 2016년 학교와 주민들의 염원인 매머드급 강당 라온관을 개관하였다.
 개교 100주년을 맞이한 동항초등학교는 2019년 2월 제77회 졸업식을 가져 총 21,13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현 부산광역시 김석준 교육감이 우리 학교 27회 졸업생으로 미래 인재 양성과 교육복지 확대를 위한 부산교육 발전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 자랑스럽다.
 끝으로, 개교 100주년을 맞이한 동항초등학교는 역사와 전통을 밑거름으로 새로운 한 세기를 이끌어 갈 4차 산업혁명시대 창의적인 인재 양성을 위해 동항교육공동체 모두가 힘을 모아 효율적인 교육활동을 펼쳐 번창하는 동항초등학교의 미래를 기원한다.

 이규섭(전 동항초등학교 교장·24회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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