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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80년 전 용당 신작로 탄생의 비화)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80년 전 용당 신작로 탄생의 비화
작 성 자 문화미디어과 등록일 2023/09/18/ 조   회 59
첨부파일
80년 전 용당 신작로 탄생의 비화
"땅 주면 전기 줄게" 일제의 달콤한 `빅딜'

응답하라,
남구의 1980!

퍍 용당동 동명오거리


 용당동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사에 부산 역사의 단면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신선대에 검역소가 만들어지고, 한국동란 때는 용당동의 모래와 자갈, 석산의 견치돌로 UN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1970년대초 국내기업 중 최대 수출 실적을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동명목재가 1980년 5월 도산하였다. 동명이 도산하자 1980년대 용당동은 말할 것 없고 부산경제가 침체되고 어려운 시기였다. 동명의 본사 자리에는 관세청이 들어섰고 일부 부지는 작은 회사로 분양되었으며 넓은 공장부지는 대부분 해양수산부 소속이 되었다.
 위 사진은 1980년도 동명오거리가 만들어지기 전의 한적한 용당동 풍경으로 보인다.
 사진에서 대연동쪽으로 가는 도로에는 현재 가나병원, 한신아파트와 새마을금고가 들어서고, 동명전문학교에서 동명전문대학으로 교명이 바뀌면서 학생들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거리에는 점차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다.
 지금의 동명오거리가 만들어지면서 밭과 야산은 전투경찰대와 해군아파트, S-oil주유소가 들어섰다. 동명오거리 주위에는 동명공고와 부산은행, 차량 판매소가 들어서면서 상권이 형성되었고 사통팔달로 교통망이 펼쳐진다. 신선대부두로 가는 왼쪽 도로에는 과거 염산공장이 있었다. 그 옆으로 현재 GS칼텍스 주유소와 용당동119 안전센터가 있다. 염산공장이 있던 자리는 컨테이너가 쌓여 있지만 현대전기차 공장이 들어설 예정으로 되어 있다. 본동의 북쪽 산자락에는 1983년 부경대학교 용당캠퍼스가 기공을 하였다. 이 땅도 동명 소유였다.
 동명오거리는 행정구역상 용당동인데 신선대부두로 가는 남쪽을 용당이라 부르고 부산문화회관 방향의 북쪽을 갓골이라는 별칭을 부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일제강점기 동명오거리는 우룡산 줄기로 신용산과 연결되어 있는 야트막한 산이었다. 이곳에는 옛날부터 소쿠리 터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소쿠리 터의 전설은 동명오거리를 중심으로 남쪽바다를 향해 동서로 뻗은 두 산줄기를 소쿠리의 좌·우 테로 정하고 동명오거리는 한 가운데로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복을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있다는 전설이다. 그런데 1929년 선박 입출항과 물동량이 늘어나면서 수출입 검역화물도 자연히 증가해 이 소쿠리 터를 허물고 육로차도를 개설하였다. 차도 개설 소식에 소쿠리 터 지형이 파헤쳐지니 마을어른들이 전설의 용당동 복터를 파괴한다며 차도 개설을 반대하였다. 이에 일제는 차도 공사를 하기 전 마을사람들에게 땅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는 전기를 공짜로 달아준다는 제안을 하였다. 땅의 편입이 없는 주민들과 차도 개설로 용당동 발전을 앞당긴다는 주민들 사이에서 설왕설래 말이 많았다.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생활하다가 전깃불이 들어오는 것은 어둠속에서 광명을 찾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검역소의 환한 전깃불을 부러워했으며 불빛 아래서 일을 하고 싶은 용당동 사람들의 바람이었다. 도로 개설공사가 시작되자 소쿠리 터를 지키기 위하여 우려했던 충돌 사태는 없었고 비포장도로가 생겼다. 그리하여 1929년 남구에서 최초로 용당동에 전기가 들어왔다. 전설의 소쿠리 복터는 이렇게 맥없이 파헤쳐지고 오늘날 동명오거리가 되었다.

최방식
향토사연구가·용당동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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