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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산, 바다 그리고 소금 마을의 탄생)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산, 바다 그리고 소금 마을의 탄생
작 성 자 문화미디어과 등록일 2022/12/02/ 조   회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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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용호동과 분포염전

 1909년까지 용호동은 바닷가에 소금 동이가 있다고 하여 분포리(盆浦里)라고 불렀다. 일제는 용호만의 바다가 호수와 같았다고 용호리(龍湖里)라고 개명했는지 모를 일이다.
 이 사진은 1952년 용호동 뒷산에 주둔했던 미 제1해병대의 부대에서 산 아래의 용호동을 향해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에는 산이 유난스럽게 많이 있다. 왼쪽에는 학생수련장이 있는 금련산, 가운데 가장 멀리서 우뚝 솟은 산이 금정산이다. 오른쪽의 큰 산은 장산이다. 사진의 오른편 중단에 용호동의 동산과 장자산이 보인다. 장자산의 푸른 숲 아래에 `동쪽 마실'이라고 불리던 2패가 나타나 있다.
 산 아래의 중앙에는 남천동의 해변과 붉게 헐벗은 산이 수영구청과 삼익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중골산이다. 오른쪽에 하얗게 헐벗은 산이 민락동의 백산으로 한때 이곳의 우편 해변에는 조선의 수군 기지들인 경상좌수영, 축산포, 감포, 칠포, 포이포 등이 다 모였다가, 좌수영, 포이진만 남았다. 을사늑약 이후 모두 혁파되었다.
 사진 중앙의 왼편에 용호동 아래쪽의 낮은 산이 운전면허시험장이 있는 곳이다. 사진 정중앙의 중골산과 백산 사이에 광안리해수욕장의 하얀 모래사장이 보인다.
 용호동에는 용호농장으로 가는 큰길이 유일한 국도였다. 이 길을 따라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진의 오른쪽에 미군 부대로 오르는 붉은 황톳길이 보인다. 이 길의 입구는 성모병원보다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주택가로 변모되어 찾기 힘들다.
 미군 부대로 가는 길의 바로 앞의 산과 들판에 있는 마을이 `1패'라고 불렀던 용호동의 `윗마을'로 가장 오래전에 형성되었던 마을로 추정된다. 아주 오래전에는 짙은 송림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갈대밭이었기 때문이다.
 그 짙은 송림을 `솔밭공원'이라고 한다. 솔밭 옆에 작은 언덕이 있어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연결했던 길이 있었다. `3패'라고 불렸던 아랫마을은 1960년대까지 용호동 중심이 되는 마을이었는데, 최 씨네 집안의 방앗간과 야학교, 1960년 대 개발되기 전까지 염전의 버스 종점이 이곳에 있었다.
 가운데 맨 오른편에 보이는 마을이 `4패'로 용호동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조선 시대에 동래군에서 소금 동이가 가장 많았다. `분개소금'을 생산했던 염전은 용호동 입구로부터 바닷가 쪽으로 넓게 뻗어있었다. 사진에는 3패의 아래쪽과 소량천 다리를 건너 섶자리 쪽에도 넓은 염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호만의 바다를 바라보면, 용호동 쪽 해안이 희게 보인다. 사진을 찍었을 때가 썰물 때였을 것이다. 바닷물은 거의 100m 정도 물이 빠졌으므로 희게 보였다. 후에 이곳에 동국제강이 들어섰다가 LG메트로시티라는 대단지아파트가 조성됐다.
 사진에 송림공원 아래쪽에 집 몇 채가 외롭게 서 있었는데 후에 이곳의 앞쪽에 용호초등학교가 세워졌다. 학교 길 건너편에 있는 용호어린이집 앞에 용호동 최초의 학교이자 대연초등학교의 전신인 `동명학원'을 세운 참봉 김성학의 장학불망비(參奉 金成學 將學不忘碑)가 용호동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서 있다.
글=공기화 남구향토사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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