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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유현의 부산 유물이야기)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유현의 부산 유물이야기
작 성 자 문화미디어과 등록일 2023/07/31/ 조   회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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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대비한 선조들의 지혜, 사처석교비

 조선시대 동래에서 하천의 범람으로 인한 다리의 유실과 보수가 잦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에 1781년 동래 관민이 힘을 합하여 동래 남문 밖 온천천을 건너가는 나무다리 4개를 안전한 돌다리(석교)로 교체하고 그 기록을 남긴 것이 `사처석교비(四處石橋碑, 시 지정 기념물)'이다.
 조선시대 동래는 중심지 동래읍성을 기준으로 북쪽에 마안산과 윤산, 서쪽에서 남쪽으로 휘감아 도는 온천천, 동쪽을 유유히 흐르는 수영강을 경계로 행정과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따라서 동래읍성과 외곽지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하천을 건너기 위한 다리가 필요했다. 지금도 동래 지역으로 드나들기 위해선 온천교, 세병교, 수연교, 연안교, 연산교, 안락교, 원동교 등 각종 다리를 거쳐야만 한다. 특히 동래 남쪽 지역으로의 이동량이 많아 과거에도 4개의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문제는 나무라는 재질의 성격상 홍수와 하천 범람으로 인한 안전 문제에 취약했다는 것이다.
 사처석교비에 새겨진 당시 기록에 `동래부 남문 밖에 나무다리 네 곳이 있는데, 매번 일이 년마다 한 번씩 고쳐야 했고 그 비용을 동래 부민들에게서 거두었으니, 부민들이 힘들어한 것이 오래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강위성(姜渭聖)이 돌다리로 교체하자는 의견을 내고, 박도유(朴道裕) 등이 직접 자금을 모금하여 산에서 석재를 캐어왔다. 이를 바라본 동래부사 이문원(李文源)은 자신의 녹봉까지 기부하며 곧장 석재를 운송해 오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렇듯 사처석교비의 기록을 살펴보면, 마을의 재난에 대비하고 부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동래 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였음을 잘 알 수 있다.
 사처석교 건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강위성과 박도유는 동래무임 상층부에 속했던 인물이다. 이들은 동래 관아에 소속되어 군사와 경찰 사무를 장관청에 모여 처리하였으며 실질적으로 동래 사회를 이끌던 세력이다. 동래부사 이문원은 최고 책임자의 위치에서 이들의 헌신을 강력히 지지하였으며, 동래 부민들은 다리가 완성된 후 부사와 무임들의 행적을 기리는 비석을 만들어 남긴 것이다. 더구나 이 비석의 글씨를 부산진순절도(보물 제391호), 동래부순절도(보물 제392호)를 그린 조선 후기 부산 출신 대표적 화가인 변박(卞璞)이 썼다는 점은 역사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소소하지만 양념같은 재미이다. 사처석교비는 부산박물관 2층 부산관에 전시되어 있다. 부산박물관 전시운영팀장

사처석교비, 시 지정기념물,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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