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home 부산남구신문 > 오피니언
  • facebook
  • twitter
  • print
오피니언 (빈센트 커트니의 Freedom is not free)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빈센트 커트니의 Freedom is not free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21/10/01/ 조   회 154
첨부파일
아내 위해 양로원 들어간 영웅에 박수를

 나의 오랜 친구 마이클 추보카(Michael Czuboka)는 올해 90세이다. 현재 캐나다 마니토바주의 주도인 위니펙의 어느 양로원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그는 1931년 9월 17일 우크라이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캐나다국유철도원이었는데 초보카는 개조한 철도박스카에서 출생했다. 부친의 건강이 좋지 않아 추보카는 재봉사와 청소부로 일한 어머니 손에서 성장했다. 8살 때 어머니 가게에서 채소를 파는 것으로 일을 시작해 10대에 식료품 배달과 맥도날드 농장 트랙터를 운전했다. 추보카에게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전쟁영웅인 형 월터가 있었다. 월터는 대서양과 유럽 상공에서 50번 이상 임무를 완수한 캐나다 왕립 공군(RCAF)의 비행장교였는데 어린 추보카에게 있어 우상이었고 군인의 자부심을 일깨워줬다. 이런 영향으로 1950년, 18세가 된 추보카는 한국전쟁 자원병 모집에 조금의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이때 자신의 나이를 19세라고 속여 입대했다. 당시는 출생증명서를 확인하지 않아 입대 절차는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패트리샤공주경보병연대(PPCL) 2대대에 배속돼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복무했다. 복무기간에 그는 한국전에 참전했고, 1951년 봄 치열했던 가평전투를 치렀다. 추보카의 2대대는 가평전투로 미국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추보카는 1951년 후반 캐나다로 돌아와 군복무를 이어갔다. 1954년 제대 후 대학에 진학해 두 개의 학사와 두 개의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재학 중 캐나다 장교훈련단 프로그램에 참여해 중위로 임관했지만 예비역으로 남아 재입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하키와 미식축구 선수로도 활동했고 60세까지 하키와 야구를 즐겼다. 70세 때는 아시니보인강에서 혼자 카누를 타고 브랜든에서 위니펙까지 14일간 500㎞를 여행하기도 했다.
 그는 고향인 매니토바주에서 교육자이자 행정가로 눈부신 경력을 쌓았고 책도 여러 권 출간했다. 그 중에는 한국전과 관련된 자전적 소설도 있다.
 추보카에게는 훨씬 나이 어린 아내 헬레나가 있다. 그녀는 병원 응급실 간호사로 일하는데 근래에 안면마스크에 방호복을 입고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다. 극심한 관절염에 시달리던 추보카는 더 이상 집에서 생활이 어렵다는 판단에 2년 전 아내를 위해 힘든 결단을 내렸다. 간호사로 일하는 아내가 병원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자진해서 양로원에 입소한 것이다. 주말에는 아내를 만나러 집에 오지만 나머지 시간은 퇴직자 전용 시설에서 쓸쓸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한국과 모든 참전용사들을 지지하는 열정적 애국자이다.
 얼마전 아내 헬레나가 그런 남편에게 따뜻한 메시지를 보내 격려했다. "중요한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당신의 영혼을 감염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에요(What is important is to not let the Covid infect your soul)."

마이클 추보카(오른쪽) 캐나다 참전용사의 한국전쟁 때 모습. 작은 사진은 부인과 함께 그린 초상화.


빈센트 커트니 명예기자의 원고료는 본인의 뜻에 따라 남구에 거주하는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위해 쓰입니다.
목록

만족도조사 ㅣ 현재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와 편의성에 만족하셨습니까?

  • 5점(매우만족)
  • 4점(만족)
  • 3점(보통)
  • 2점(불만)
  • 1점(매우불만)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