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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곽태욱의 바람고개 이야기Ⅱ)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곽태욱의 바람고개 이야기Ⅱ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21/12/07/ 조   회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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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물고 있다. 우리 고장 향토사를 부산남구신문 `바람고개 이야기'에 기고해 온 필자로선 아쉬움이 남는 한 해였다. 그 이유는, 먼저 문현동의 `지게골'부터 돌아보자. 여기서 `지게'는 사람이 등짐을 지는데 필요한 그 지게가 아니다. 다만 한자는 같은 `호(戶)'를 쓴다. 한자 `문(門)'을 보자. 문짝이 두 짝이다. 이와 달리 `호(戶)'는 외짝 문을 형상화한 것이다.
 순우리말로 `지게문'이다. 옛날 전통적인 일반 가옥은 대부분 마루와 방 사이 혹은 부엌과 마루 사이에 외짝문이 있었다. 이와 같은 지형이 문현(대연)고개이다. 어째서 그런가. 황령산 줄기 하나가 뻗어서 이곳까지 내려왔다. 반대편 우룡산 쪽에서도 내려왔다. 두 산자락이 겹쳐지며 꽤 높은 고개를 이루었다. 이 고개를 멀찍이 떨어진 문현교차로에서 바라보니 `외짝의 문'처럼 보였다. 옛사람들은 그렇게 여겼던 모양이다. 암튼 이 지게문을 열고 들어서야(고개를 넘어서야) 대연동, 수영동, 용호동 등지로 갈 수 있었다. 황령터널이 개통되기 전만 해도 오직 이 지게골을 넘어야 했다.
 아직도 그 옛날 고갯마루가 얼마나 높았는지 가늠되는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 그 일대가 재개발 중이라 곧 사라질 것 같다. 그런데 최근 문현교차로 북편의 문현 안동네를 지게골로 기술해 놓은 책을 본 적 있다. 마을 이름을 1900년대에 다시 정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곳은 `고동골'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누구든 지게골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2200여 년 전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 도를 닦는 방사(方士) 신분의 서복(敍福)을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으로 보냈다. 이른바 `불로초 원정대'다. 누군가는 어이없게 방사를 서복 일행이라고 했다. 암튼 불로초 원정대장 서복은 서해를 건너와 한반도 전역을 탐방했다. 마침내 지금의 문현4동 강선대(降仙臺)까지 다녀갔다. 이를 두고 누군가 `서복을 기념하기 위한 사당이 배정고등학교 운동장에 있었다'라고 하면서 허름한 집 사진까지 실어 책까지 펴냈다. 그 허름한 사당은 현재 배정미래고등학교 남향 약 50m쯤 아래에 실재한다. 사람 발길이 매우 드문 작은 사찰 위 외진 곳에 있으니 날조한들 알 리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또 누군가는 강선대를 `광선대(廣仙臺)'로 둔갑시켰다. 신선이 내린 곳을, 신선이 놀던 넓은 곳으로 바꿔버렸다.
 이번엔 용호동으로 가보자. 이기대(二妓臺) 유래를 밝힌 『내영지(萊營誌)』는 경상좌수사를 지낸 `통정대부 행절도사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이형하'가 철종 원년(1850, 음력 9월 상순)에 편찬했다. 그런데도 `경상좌수사 재임(1850년) 때 편찬했다'는 기록이 떠돈다. 현 수영사적공원 25의용단 비문에 본인이 직접 `전 승지 이형하'라고 쓴 기록도 있다. 이 외에도 용호동 동생말은 본래 `동산말'이었고, 낙농마을로 불리던 대연동의 대동골은 본래 `대룡골'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지명들도 모두 바루어야 할 향토사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해를 넘기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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