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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옛날 지도로 보는 남구 〈4〉 황령봉)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옛날 지도로 보는 남구 〈4〉 황령봉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21/12/07/ 조   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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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애민사상 녹아든 황령산 봉수대

 봉수대는 스마트폰이었다. 고려면 고려, 조선이면 조선 그 시대 최고의, 그리고 초고속의 통신시설이었다. 조선의 경우 조선팔도 봉수대 없는 데는 없었다. 한 군데서 신호를 보내면 사방팔방 퍼져서 삽시간에 서울에 당도했다. 도중에 소홀히 하는 봉수대가 어느 한 곳이라도 있으면 국가적 재앙이 될 수 있기에 조선 오백년 내내 1급 관리시설이 봉수대였다.
 국경의 봉수대는 특히 중요했다. 적의 침범을 맨 먼저 알리는 봉수대였기 때문이다. 부산은 국경도시였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마도가 보일 만큼 일본과 가까웠다. 왜구는 잊을 만하면 바다를 넘어와 해안가 마을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임진년에 발발한 왜란은 부산의 봉수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각인시켰다. 이후 부산의 봉수대는 더욱 견고해졌고 조밀해졌다. 부산의 봉수대는 조선 봉수대의 맨 앞이었다.
 황령산봉수대는 부산 봉수대의 중심이었다. 옛날 지도엔 `황령봉(荒嶺烽)' 또는 `황령봉대(荒嶺烽臺)'로 표기했다. 여기서 봉수를 피우면 양옆에 있는 구봉과 간비오봉 봉수대가 이를 받아서 곧바로 봉수를 피웠다. 이렇게 해서 경상도를 비롯한 조선의 해안은 일시에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금정산성 인근의 계명산봉수대도 황령산 신호를 받아서 북쪽으로 전파했다. 북쪽은 상감 계신 한양. 내륙의 봉수대는 한 치 소홀함 없이 북쪽으로, 북쪽으로 봉수를 밀어 올렸다.
 황령산봉수대는 세종대왕의 봉수대다. 백성을 어여삐 여겨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어여쁜 마음이 스민 봉수대가 황령산봉수대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조선 오백년 최고의 기록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에 그렇게 나온다. 왕조실록 한 부분인 세종실록에는 대왕의 육성 어록이 연도별로 날짜별로 생생하게 실렸다.
 세종 4년(1422) 8월 19일. 이날도 조정의 대신이 모인 자리에서 국사를 논의한다. 오늘 읽을 장계는 경상도 해군사령관이 올린 보고서. 봉수대 설치에 관한 보고서다. 이때의 경상도는 부산을 포함한다. 보고서 내용은 어떻고 대왕은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그날 기록을 인용한다. 맨 뒤에 보이는 연대(烟臺)는 봉수대를 말한다.

 경상도 수군 도안무처치사가 올리기를, "봉홧불을 올리는 장소에 보루와 장벽으로 의탁할 곳이 없어서, 이로 인하여 흔히 적(敵)의 겁탈을 당하게 됩니다. 법령이 비록 엄하나, 사람들이 모두 의심스럽고 두렵게 생각하여, 마음을 다하여 정찰하려 하지 아니하니, 청컨대, 높게 연대(烟臺)를 쌓고, 활 쏘는 집과 화포(火砲)와 병기(兵器)를 설치하여, 밤낮으로 그 위에서 적이 변동하는 것을 관망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모든 도[제도(諸道)]에 명하여 모두 연대(烟臺)를 쌓으라고 명하였다.

 황령산봉수대는 이때부터 건립에 들어갔다. 비슷한 시기에 편찬한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세종 7년(1425년) 이전 건립됐다고 했으니 황령산봉수대 첫 점등은 1422년에서 1425년 사이 이뤄졌다. 경상도에서 시작해 조선 제도(諸道)로 번진 세종대왕의 봉수대! 그 맨 앞, 그 중심이 황령산봉수대였다.
 조선의 봉수대는 평상시에도 불을 피웠다. 평상시에는 하나를 피웠고 적과 맞붙으면 다섯을 피웠다. 평상시에는 초저녁에 하나를 피우다가 긴장상태가 조성되면 둘, 셋, 넷으로 서서히 높였다. 그러다 마지막 단계에서 다섯을 피웠다. 이것을 거화법(擧火法)이라고 했다. 불길이 보이지 않는 대낮엔 연기를 피웠다. 부산항 개항 100주년을 기념해 1976년 복원한 황령산봉수대 불구멍이 다섯인 이유다.
 조선의 백성에게 봉수대는 평화의 신호였다. 초저녁 물들이는 봉홧불 하나를 보며 별일 없음에 감사했고 생업에 전념했다. 왜구의 잦은 침범으로 봉홧불은 둘도 되고 셋도 되고 넷도 되었으며 임진년 왜란 때는 다섯도 되었지만 그런 날보단 하나만 피운 날이 몇십 배, 몇백 배는 많았기에 조선의 봉수대는 군사시설이면서 평화의 상징이었다.
 옛날 지도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때 지도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누구보다 민감했다. 황령산 꼭대기 봉수대에다 벌건 `불뎅이'를 그려 넣었을망정 그 느낌은 뜨겁지 않고 따뜻했다. 조선 오백년 내내라고는 말 못 해도 조선 오백년 오랜 날들을 부산 사람에게 안도감을 줬던 황령산봉수대! 한국 대도시 가운데 봉수대가 가장 많은 도시가 부산이다. 현존하는 봉수대만 무려 11군데다. 11군데 부산 봉수대의 중심에 황령산봉수대가 있다.
동길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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