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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곽태욱의 바람고개 이야기Ⅱ)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곽태욱의 바람고개 이야기Ⅱ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21/08/02/ 조   회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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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동에 있었던 세 개의 큰 못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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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연동의 큰 못 중 고대사회부터 존재했던 생천언 시대가 저물고 일제강점 때인 1930년 신축 저수지가 완공되었다. 이 저수지 축조 현장 목격담을 듣고 자란 분이 있다. 그 주인공은 공자(孔子)의 후손으로 1850년경 경남 양산에서 부산의 남촌면(못골)에 정착한 입향조로부터 지금까지 누대에 걸쳐서 대연동 토박이로 살고 있는 곡부 공씨(曲阜 孔氏) 77대손인 수필가 공기화 부산교육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저수지 축조 목격담을 전하신 분은 1926년 남촌면 못골로 시집와서 공 교수 형제들을 낳고 기르신 선대부인(1908년생, 밀양 박씨)이시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 옛날 대연동에 있었다는 세 개의 못에 대하여 오류가 있음을 비정하게 된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려면 무엇보다 신빙성이 보태져야 마땅하다. 그래서 고단한 답사길에 오르게 되었다. 먼저, 이 글에 등장하는 건물, 마트, 식당, 학교, 기관 등은 구불구불하게 흐르던 옛 못의 물길을 쉽게 알아보는 데 필요해서 상징적으로 언급하였을 뿐 실제 물길이 그곳을 관통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사실 그 옛날 대연동에 세 개의 못이 있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맞는 말도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먼저 일제강점기 1930년 수리조합에 의하여 생천언 바로 위에 대형 저수지가 신축되었다. 이로써 생천언 기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그 이후 생천언은 1960년대까지 양어장으로 활용되었는데, 양어장 운영이 점차 어려워지자 매립되기 전까지 늪지로 방치되었다. 공 교수가 이 늪지에서 썰매를 타던 어린이들을 마지막으로 봤던 때가 1968년 1월 겨울이라고 했다. 그러니 생천언이 가장 아래쪽에 있던 못이었고, 이 생천언을 무용지물로 만든 신축 저수지가 중간 위치인 두 번째 못이 된다.
 세 번째 못은 밤나무가 무성했기 때문에 `밤골'로 불리던 지금의 동천고등학교 옆에 있었다. 위치상으로는 맨 위쪽이다. 그런데 이 세 번째 못은 그 크기와 수심, 담수 능력 등에서 과연 `못'으로 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굳이 그 크기를 따지자면 넉넉잡아 지름이 3m쯤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밭일하던 농부가 베잠방이 걷어 올리고 흙 묻은 다리를 씻거나 멱을 감는 웅덩이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2개의 못이 대연동에 있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그렇지만 대연동에 큰 못 3개가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마지막 세 번째 못은 지금의 남구청 뒤 대연6동 행정복지센터 부근에 있었다. 이 못은 현재 성업 중인 `더마트' 앞 삼거리쯤, 문현 안동네 진남로를 향하는 도로까지 포함되었다고 하니 그 지름이 대략 30m 이상 되는 크기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못은 한국전쟁 때 미군들이 황령산 서쪽 자락의 고동골(문현 안동네) 능선을 깎아 전포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만들 때 여기에서 나온 돌과 토사로 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가·향토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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