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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곽태욱의 바람고개 이야기Ⅱ)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곽태욱의 바람고개 이야기Ⅱ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21/08/31/ 조   회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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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욱의 바람고개 이야기Ⅱ
신라시대까지 거슬러가는 물줄기
뜦대연천 톺아보기 팞

 옛날 대연동의 크고 작은 못들은 1960∼70년대 토지구획 정리로 택지화되면서 모두 매립돼 유구는 아예 찾을 수 없다. 다행히 공기화 부산교대 명예교수의 기억이 1950∼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어제 본 듯 또렷해서 생천언의 위치와 신축 저수지의 대략적 크기까지 가늠해 볼 수 있었다.
 1930년 신축한 저수지는 지금의 대연5동 못골파출소에서 남구청을 향해 이면도로를 걸어가며 시작된다. 잠시 뒤 왕복 2차선 못골번영로를 가로질러 곧장 이면도로를 따라가 주택지 너덧 블록을 지난다. 그리고는 황령산 방향인 오른쪽으로 걸음을 틀어 부산예술대학교 입구까지 간 뒤 그때까지 걸어온 거리와 면적을 직사각형 형태로 대강 그려보면 이 신축 저수지의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어림잡아 가로 64m, 세로 56m, 둘레 240m쯤 된다. 못 둘레만 치면 생천언의 배 이상 되는 크기다.
 그렇다면 대연동 동명(지명)의 유래가 된 `큰 못' 세 개 중 생천언이 가장 아래쪽에 있던 못이었고, 지금의 대연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다는 기록이 사실인가. 그리고 1930년 저수지 신축 때 생천언을 매립했다는 주장도 사실인가. 생천언의 축조 역사가 각석에 새겨져 전해진 것은 아니지만 1968년까지 존재했다는 점이 그 의문을 푸는 열쇠이다. 왜냐면 생천언과 신축 저수지를 기억하고 있는 토박이 원로 주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같으면 문화유산으로 생천언의 유구 한 조각 정도는 보존했을지도 모르는데, 그 아쉬움을 다른 각도로 돌려보면, 먼 고대 가야제국의 변방이자 부족국가였던 거칠산국이 신라에 흡수되기 전 용호만이 내려다보이는 황령산 남쪽 기슭에 커다란 못 형태를 갖고 있었고 그것이 신라에 복속된 뒤 튼튼한 수리시설로 축조한 것이었다면 고대 농경사회의 물 이용은 시대를 불문하고 중요한 자원이었음을 시사케 한다.
 무엇보다 농사에 물을 이용했던 선조들의 지혜를 알 수 있고, 또 이 지역을 터전으로 삼은 몽리민(蒙利民:수리시설에 담은 용수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오곡백과가 영그는 농경 생활을 영위한 모습도 상상된다. 하지만 신라 때 축조했다고 추정되는 그 `생천언'은 고려에 복속된 935년부터 조선조 1740년까지 무려 800여 년 동안 그 존재가 묻혀 있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생천언 바로 위에 신축 저수지가 조성되면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또 1968년에 이르면 모든 못이 매립돼 택지화돼 `상전벽해'가 된 지 오래다. 그러니 그 생천언이 지금의 대연초등학교 부근에 있었고, 큰 못 세 개 중 맨 아래쪽에 있었느냐 없었느냐, 그게 중요한가 하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한 답은 명료하다. 우리 고장의 향토사가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루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먼 옛날 대연동의 넓은 들판을 적셔주던 생천언이 어디쯤 있었고, 그 물줄기가 어느 굽이를 돌고 돌아 대연천을 이루어 용호만 바다로 흘러갔는지 제대로 아는 것 역시 향토사의 한 페이지를 바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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