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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지도로 보는 남구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21/08/31/ 조   회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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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지도로 보는 남구
〈1〉 제뢰등대
격동의 근대사 밝힌 부산 등대의 시조 

 제뢰등대는 한자가 좀 어렵다. 스마트폰 옥편에 찾아보면 사다새 제(?), 여울 뢰(瀨)로 나온다. 사다새는 설명을 붙이면 길다. 오리처럼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 있는 새 정도로 알자. 지금은 등대가 육지에 있지만 처음 세울 때는 먼바다 암초 위에 있었다. 오리여울로 불리는 암초라서 제뢰등대란 이름이 붙었다.
 제뢰등대는 부산 최초의 등대다. 지금 남아 있는 등대 가운데 그렇다는 이야기다. 1900년대 들어 부산 최초 등대는 1904년 8월 세운 부산도등(導燈)이다. 도등은 입항하는 배가 안전하게 들어오도록 인도하는 유도등이다. 앞과 뒤에 하나씩 세운 등대와 일직선을 맞추어 입항하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었다.
 1905년 6월. 제뢰등대가 처음 점등한 때다. 등대를 떠받친 암초가 환했고 등대를 둘러싼 바다가 환했고 첫 점등을 지켜본 이들 표정이 환했다. 물론 상상으로 하는 말이다. 점등을 지켜본 사람이야 왜 없었겠느냐 마는 그런 것에 대한 자료는 찾기 힘들다. 제뢰등대가 나오는 관광엽서를 일제강점기 제작했다고 하니 관심이 컸던 등대인 것은 분명하다.
 관심은 일본이 컸다. 일본의 집요한 요구로 세운 등대였다. 일본이 요구하기 전에는 그 자리에 등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용두산 아래 방파제에 둘러싸인 7천 평의 선박 계류장과 우암천, 못골, 적기의 포구, 그리고 감만의 군영이 부산 바다의 전부였기에 굳이 먼바다에 등대를 세울 이유가 없었다.
 발단은 청일전쟁이었다. 1891년과 1892년 벌어진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조선 정부에 안하무인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수시로 무리한 요구를 했고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괴롭혔다. 일제 요구는 이거였다. 자기네 군함이나 상선 따위의 안전 운항을 위한 한반도 모든 해안의 등대 설치였다. 엄연하고 명백한 주권 침해였다.
 모멸스러운 것은 또 있었다. 돈은 조선이 내고 건설은 일본해군과 조선이 나누어서 했다. 설계와 감독은 일제 입맛에 맞춰서 하고 돈과 노동력은 조선이 제공했으니 천하에 몹쓸 짓이었다. 조선 정부가 마음 바꿀 것을 우려해 조약으로 명문화까지 했다. 그 조약이 1901년 `한일무역규칙 및 해관세목'이다.
 그렇게 해서 세운 등대인 만큼 일본인 사랑은 지극했다. 앞서 말했듯 관광엽서에도 등장시키고 관광지도에도 등장시켰다. 그 관광지도가 1929년 제작한 `부산명소 교통그림지도'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이 보관하는 이 지도에 부산의 강과 바다, 부산의 찻길과 기찻길, 명소 등등 안 나오는 게 없다. 거기에 제뢰등대가 등장한다.
 지도에 보이는 제뢰등대는 바다 한가운데 뱃길 바로 옆에 있다. 자동차가 찻길을 따라서 다니듯 배는 뱃길을 따라서 다닌다. 바다에 길이 어디 있겠나 싶어도 길 없는 바다는 없다. 길을 무시하고서 아무렇게나 다니면 차도 배도 사고가 나기 마련이다. 사람인들 안 그럴까.
 지도는 뱃길을 선명하게 그렸다. 일본에서 시작했을 뱃길은 신선대와 오륙도를 지나고 제뢰등대를 스쳐서 부산항으로 이어진다. 뱃길엔 통통배가 보이고 군함이랄지 상선이랄지 큼지막한 배는 물살을 가르며 부산항으로 나아간다. 이때만 해도 오륙도에 등대가 없었다. 오륙도등대는 1937년 세웠다. 그전까진 부산의 해상등대는 제뢰등대가 유일했다. 1934년 제작 영도지도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육안으로 보는 제뢰등대는 예쁘다. 손톱 매니큐어 같다. 첫째와 셋째, 다섯째 손톱에는 빨간색을 바르고 사이사이에 하얀색을 바른 지도에는 그렇게 나와도 실제론 홍색과 흑색을 옆으로 칠하고 상부를 백색으로 덮었다. 등대 불빛은 백색 부동등이었고 가스등을 사용했다. 부동등은 켰다 껐다 하지 않고 늘 켜둔 등. 오리여울 암초가 일제로선 그만큼 위험한 존재였다는 이야기다. 조선으로선 독립군 같은 암초였던 셈이다.
 지금 제뢰등대가 있는 곳은 감만동 바닷가. 등대 위로는 부산항대교가 내달린다. 바다가 매립되고 부두가 들어서고 하면서 먼바다 등대에서 방파제 등대가 되었다가 2001년 등대 기능을 마치고 영구보존 등대로 지정됐다. 영욕의 95년 세월을 마감하고 안식에 든 등대를 알현하고 싶다면 감만시민부두로 찾아가면 된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같은 등대가 거기 계신다. 동길산 시인

근대 일본의 지도 제작자로 유명한 요시다 하쯔시부로가 1929년 조선박람회 관광 안내용으로 만든 `부산 명소교통도회(名所交通圖繪)'. 간결하게 그린 조감도이지만 90년 전에도 부산이 거대한 항만물류도시였음을 잘 보여준다.
조선박람회는 총독부가 조선의 식민통치 20주년을 기념해 1929년 9∼10월 서울 경복궁에 개최한 대형 박람회이다. 삽화=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감만시민부두에 있는 제뢰등대.
제뢰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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