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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유현의 부산 유물이야기)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유현의 부산 유물이야기
작 성 자 문화미디어과 등록일 2023/02/01/ 조   회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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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후반,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 남구의 못골동산이나 부산박물관, UN기념공원을 소풍 장소로 자주 찾았다. 그때 몇몇 친구들로부터 "너거들 저기 감만동 고개로 넘어가면 문디한테 잡혀 간다이가"라는 말을 들었다. 어린 마음에 조금 두렵고 궁금했는데 세월이 한참 흘러서야 과거 감만동 고개 너머에 용호동 나환자 마을과는 별개의 거대한 나환자 집단부락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문화재라는 열쇠가 필요하다. 동구 일신기독병원 뒤뜰에 숨어있는 `부산 나병원 기념비(국가문화재 제781호, 2020년 지정)'는 감만동과 용호동의 사라진 나환자 마을의 비밀을 알려준다. 비석의 원래 명칭인 `대영나병자구료회기념비(大英癩病者救療會紀念碑)'는 영국 나병환자 구료단체에 소속된 부산 나병원을 기념한다는 의미이다. 비석 측면에는 개항기 의료선교사로 잘 알려진 심익순(Smith)과 어을빈(Irvin), 사목사(Sidebotham)의 공로로 부산 나병원이 1909년에 창립되었으며, 부산 나환자들의 아버지로 불렸던 매견시(호주 이름 제임스 노블 맥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호주 선교사 매견시의 헌신에 감사하는 마음을 나환자들이 직접 돌에 새겨 1930년에 부산 나병원 뜰에 세운 것이다.
 그렇다면 부산 나병원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나환자 치료소'인 부산 나병원은 1909년 감만동 산자락에 건립되었다. 이듬해 1910년 `상애원(相愛院)'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개원하고 1912년 매견시가 관리자로 부임했다. 감만동에 나병원이 세워진 이유는 북으로 언덕을 등지고 있어서 북풍을 막아주고, 남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어서 나균 확산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나환자들이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애원의 최초 위치는 현재 감만2동 새마을금고 주변으로 추정된다. 이후 병원이 확장하면서 나환자를 600명 이상 수용했다. 감만2동 옛 부산외대 입구에서 대연4동 푸르지오아파트 입구까지 이르는 대규모 나환자 집단촌락이 형성되었고 부지 면적은 2만6,000평에 달했다. 촌락에 들어오지 못한 환자들은 문현동 지게골(호곡)에 모여 마을을 형성해 생활했다. 1938년 일제는 매견시를 간첩 혐의로 추방하고, 1941년 상애원 부지를 군사 요새화했다. 이때 소록도 갱생원으로 강제 이주를 거부한 일부 나환자들이 오륙도 인근으로 숨어들어 마을을 형성한 것이 용호농장의 시작이 되었다.
 `부산 나병원 기념비'는 처음 감만동에서 용호동으로 다시 기장군 정관을 떠돌다가 매견시의 두 딸이 설립한 일신기독병원에 2016년 자리를 잡았다. 높이 113㎝ 비석에는 파란 눈의 선교사가 남긴 나환자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나환자의 가슴 아픈 디아스포라가 담겨있다.
부산박물관
교육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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