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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의 횡설수설 - 68년 전 오륙도 앞바다의 기적
작 성 자 문화체육과 등록일 2018/06/26/ 조   회 601
첨부파일 백두산함모형.png (44 kb)

김성한의 횡설수설 - 68년 전 오륙도 앞바다의 기적

 6·25 전쟁의 숨은 이야기, 대한해협해전을 아시는지.
 대한해협해전은 6·25 발발 당일 밤과 이튿날 새벽 사이 남구 앞바다에서 벌어진 남북 최초의 해상 교전을 말한다. 천우신조 끝에 우리 해군이 승리했고 전쟁의 물길을 돌려놓은 한국전쟁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전투다.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남침에 앞서 600명의 특수부대원을 태운 무장수송선을 극비리 부산 앞바다로 내려 보냈다. 잘 훈련된 특작부대는 부산에 잠입, 게릴라작전을 펼쳐 후방을 교란하고 부산항을 점령해 미군 지원을 사전에 차단할 계획이었다. 탱크를 앞세운 기습 도발과 무장 게릴라부대의 후방 교란, 이 양공작전이 성공했더라면 인천상륙작전과 유엔군의 개입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1950년 6월 25일 밤 10시, 우리 해군의 백두산함이 울산 방어진 근해에서 검은 괴선박과 조우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백두산함 승조원들은 이 괴선박의 정체는 물론이고 심지어 전쟁이 터졌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두 시간 여 탐색 끝에 26일 오전 0시30분, 기장 앞바다에서 첫 포성이 울렸다. 한 시간 가까이 쫓고 쫓기는 바다 위 추격전 끝에 마침내 우리 해군은 오륙도 연안에서 무장수송선을 격침시켜, 특수부대원 600명과 군수물자를 수장했다. 우리 측 수병 두 명도 전사했다.
 백두산함은 2차 대전 때 독일 유보트 탐색에 활용한 미군의 퇴역 군함이다. 해군 간부들의 봉급을 쪼개 구입한 대한해군의 첫 함정으로 6·25 발발 두 달 전에 진해항에 들어왔다. 포탄이 아까워 모형 나무탄으로 연습을 해 실전사격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견되는 이날의 승리는 결과적으로 꺼져가는 나라를 구했다. 본지는 3년 전(2015년 6월 233호) 이와 같은 내용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다룬바 있다.
 하지만 대한해협해전은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현재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한켠에 당시 백두산함에 장착된 3인치 함포와 모형 선박 그리고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풀어낸 설명 정도가 기록의 전부다. 백운포 해군작전사령부에서도 매년 6월 26일, 몇 안 남은 생존 승조원과 유가족, 보훈단체원을 초청해 해상 헌화행사를 갖고 있다. 올해도 행사를 열지만 언론의 주목은 크게 받지 못한다.
 비극적 현장을 통해 아픈 역사를 곱씹는 다크투어리즘이 여행 트렌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오륙도 스카이워크에 한 해 17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스카이워크를 걸으며 대마도만 찾을 게 아니라 68년 전 그 날의 전투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해도 `만일 그날 그 싸움에서 졌다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만한 스토리텔링도 드물뿐더러 영화 소재로도 더할 나위 없다. 좀 더 욕심을 더 낸다면, 남구 앞바다 어디에 수몰된 괴선박을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안보관광은 판문점과 DMZ에만 있지 않다.


  부산남구신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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