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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륙도 칼럼 - 한센병 환자의 구세주, 맥켄지 선교사)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오륙도 칼럼 - 한센병 환자의 구세주, 맥켄지 선교사
작 성 자 문화체육과 등록일 2017/07/26/ 조   회 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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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화 (부산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우리나라가 외국에 문호를 열고 근대문물을 받아들였을 당시 1894년부터 부산에서 의료선교활동을 한 미북장로교의 어빈(魚乙彬) 선교사 등은 부산에서 한센병 퇴치를 위한 조직을 구성하였다. 1909년에 스미스, 시더보탐, 어빈 등에 의해 구체화 되어 `나병선교회'의 재정지원으로 감만동의 외딴 언덕바지(부산외국어대학교 정문 근처)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센병 병원인 상애원(相愛園)이 세워졌다. 하지만 1년만인 1910년 경영난으로 이곳은 영국에 본부를 둔 대영구라회(大英救癩會)에 넘어가 호주장로교가 병원 운영을 맡았다. 그러면서 호주 선교사 제임스 노블 맥켄지가 책임자가 되었고, 1938년에 그가 은퇴한 후에 추르딩거 선교사가 이어서 운영하다가 1940년 12월에 강제 폐쇄되었다.

 

일제강점기 남구서 28년 헌신
 맥켄지(한국명, 梅見施)는 1865년 스코틀랜드 로스주 에워섬에서 출생하였다. 1894년 뉴 헤브리즈 선교회에 참가하여 은혜를 받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 멜번 호주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 45세 되던 1910년에 호주장로교 어린이연합회의 지원을 받아 부산에 도착하였다. 글라스고우대학 재학 때에 의학훈련을 받았던 그는 고통으로 시달리는 한센병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1912년 5월에 상애원 원장으로 취임한 후 1938년까지 헌신하였다.
 좌천동에서 감만동 상애원까지 병원선으로 환자를 이송하여 치료에 전념하자 정부로부터 매년 2만1,000엔(약 2,100파운드)을 받았다. 이 돈은 병원을 짓고, 특효약이 있다는 정보가 있으면 먼저 확보하여 치료에 최선을 다하였다. 환자들이 연일 몰려들었으나 수용할 수 없어 시설부터 확대하였다. 1916년부터 하와이의 딘(Dean) 박사 등이 개발한 대풍수 기름으로 만든 주사약이 한센병에 특효약으로 각광을 받자, 그는 그것을 구하여 환자들에게 사용해 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 주사약은 사망률을 25%에서 1.5%으로 감소시켰다.
 그는 1919년에 어린이 치료 건물인 `어린이집'을 세웠고, 1932년 5월 15일에 미감염 아동을 격리하여 양육시키기 위하여 범일동에 시온원을 설립, 운영하여 건강한 사회인으로 진출하게 하였다. 1931년에 새로운 진료소를 건립하여 미북장로교의 윌슨 박사가 보내준 전문의의 도움을 받았다. 1934년에 영국 친구의 도움을 받아 부속병원을 완공하여 한때 한센병자 650명을 수용한 적도 있었다. 1935년에 상애원은 3만여 평의 부지에 전염병 환자 수용소 2동 등 40여 채 수용시설에서 약 600명을 환자를 수용하였다. 맥켄지가 헌신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일본왕실, 조선총독 등으로부터 4개의 훈장과 많은 후원금을 받았다고 하여 그를 친일주의자라고 언급하는 이들도 있다. 1935년 2월에 그는 부산항 사진을 찍다가 체포되어 카메라를 빼앗기고 벌금을 내고 풀려난 적도 있는 것으로 보아 `친일주의자' 운운했던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1938년에 그는 호주로 돌아가서 이듬해에 호주장로교 총회장이 되었다. 그가 친일주의자였다면, 동남아와 호주 쪽으로 영토를 넓히려고 침략하던 일본을 적대시하던 호주에서 기독교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잊지 말아야 할 은혜 잊어버려
 그는 한국의 한센병 환자들이 천형의 병에서 나아 정상적인 사회인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부여받은 소명이라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했다. 맥켄지 선교사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대를 이었다. 6.25한국전쟁이 발발된 이후에 노상에서 아기를 낳는 여인들을 목격하고서 의사였던 큰 딸 헬렌(한국명 매혜란)과 간호사였던 동생 캐더린(한국명 매혜영)은 1952년 좌천동에 일신기독병원을 개원하여 지금까지 수많은 생명을 구하고 있다.
 한센환자들과 선교사들이 쫓겨 나간 상애원 자리는 1941년에 일본군 군영으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 1946년 고아원인 남광학원과 남광시장으로 변모되었다. 1939년까지 이곳 감만교회에서 사용했던 오르간은 대연교회의 `모꼬레 샬롬'에 보관되어 있다. 최근에 호주에서 맥켄지 선교사가 찍은 수천 장의 사진이 명지대학교로 건네져 크게 관심을 받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한센병이 1만 명 당 1명 미만 발병되는 국가가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맥켄지 선교사의 공로가 크다고 하겠다. 우리는 은혜를 쉬 잊고, 섭섭한 일이 있으면 남에게 원망하는 일은 평생 잊지 않는다. 28년간 한국 한센병을 퇴치하려 노력했던 맥켄지 선교사와 두 딸에 대하여 거의 모르고 있어 은혜를 잊었거나 무관심하다고 보아야겠다. 보리밭의 문둥이, 경상도 문둥이라는 말도 옛말이 되었다. 남구 한센병의 역사 용호농장도 사라졌으나 맥켄지 선교사의 업적만큼은 남구 주민이라도 다시 새겨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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