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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커트니의 Freedom is not free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22/06/03/ 조   회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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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세 어느 캐나다 노병의 한국 방문기


 한국전쟁 캐나다 참전용사인 윌리엄 크라이슬러(William Chrysler, 예명인 빌로 호칭)는 한국인 아내 경자씨와 함께 한국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영연방 4개국의 가평전투 71주년 기념식의 특별 게스트로 선정돼 한국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한국 초청은 취소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아들 그레고리 매튜 크라이슬러는 초청에 따른 모든 경비를 부담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국으로 올 수 있게 조치를 취했다. 사실, 빌을 제외한 그의 가족은 모두 순수 한국인이다. 아내 경자씨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아들 그레고리는 2007년 한국으로 이주했다. 며느리와 손자 역시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이다.
 빌은 1980년 원자로 건설 프로젝트를 위해 대형 건설사의 민간 기술자로 한국에 왔다. 이때 지금의 아내 경자씨를 만났다. 당시 그녀는 회사 행정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빌이 저녁식사에 그녀를 초대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71년 전 빌은 캐나다 패트리샤 공주 경보병연대 2대대 소속으로 가평전투에 참전했다. 가평전투는 1951년 4월 23일부터 3일간 캐나다를 포함해 영국, 호주, 뉴질랜드로 구성된 영연방 27여단이 중공군을 격퇴한 전투로 중공군의 남하를 막고 유엔군이 북한강을 경계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게 했다. 이 전투로 빌이 속한 부대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표창을 받았다. 빌은 부산항에 도착한 1950년 12월부터 한국을 떠난 1951년 11월까지 치열한 전투 현장에 있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부대원 50명 이상을 잃었다.
 코로나19로 복잡한 입국 과정을 거쳐 빌 부부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장에는 아들 그레고리와 어린 손자 윌리엄이 이들을 반겼다. 지난 4월 22일 베레모를 쓰고 빌은 참전용사 상의에 훈장과 대통령 표창, 연대 배지를 달고 가평전투 기념식장에 참석했다. 빌은 가평전투에 참전한 유일한 퇴역군인이었다. 이날 기념식에서 그는 국가보훈처가 초청한 영연방 참전용사들을 대표해 전사자들에게 헌화하는 영예를 얻었다.
 가평전투 기념식 참석 후 아들 그레고리는 빌과 그의 모친을 차에 태워 부산까지 내려왔다. 빌은 전쟁 때 찍은 소중한 사진 100여장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사진들을 남구 유엔평화기념관에 기증하고 싶어 했다. 공교롭게 유엔평화기념관은 캐나다군의 한국전쟁 참전 특별전 `26791, 한국의 방패가 되다'를 8월말까지 전시하고 있었다. 빌 가족은 광안리 호텔에 투숙했는데 방에서 아름다운 바다와 눈부신 도시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빌이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항구는 녹슬고 황폐한 창고와 막사들로 가득했다. 낡은 착륙선과 화물선, 군함들과 흐느적대는 해파리들 그리고 더러운 오물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오늘날 부산의 바다는 너무도 아름답게 변해 있어 빌은 놀라움과 충격을 받았다.
〈다음호 계속〉
UN참전용사·부산남구신문 명예기자

※ 빈센트 커트니 명예기자의 원고료는 본인의 뜻에 따라 남구 거주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위해 쓰입니다.

지난 4월 22일 경기도 가평전투 7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크라이슬러씨.

윌리엄 크라이슬러 병장(오른쪽)이 1951년 가평전투에서 부상당한 전우를 부축하고 있다. 가평전투를 상징하는 사진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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