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home 부산남구신문 > 오피니언
  • facebook
  • twitter
  • print
오피니언 (오륙도 칼럼)정보를 제공하는 표 - 글번호, 발행년도, 월, 호수, 제목로 구성된 표입니다.
오륙도 칼럼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22/01/27/ 조   회 166
첨부파일
안나
오리엔탈 끄라비 투어 책임자
전 용호동 주민

`인생 여행' 선물 받은 태국 끄라비에서 보낸 10년

 정원 부족으로 취소될 처지에 놓여 마지못해 따라간 태국 여행이었다. 현지 한국인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여자 셋이서 `뻔한' 일정을 소화했다. 부산으로 가기 위해 방콕공항에서 수속을 밟던 중 가방에 들어있어야 할 선글라스가 없어진 것을 알고 가이드에게 연락을 했고, 이게 인연으로 이어져 한국과 태국을 오가며 연애를 시작했다. 그 가이드가 지금 하나뿐인 나의 `서방'이 되었다. 남구 용호동에서 나고 자란 내가 현재 태국에 살게 된 이유이다. 남편은 여행 중 여자 세 명의 수다를 들으며 "이 여자라면 결혼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연애를 이어가던 시절, 건강검진을 했는데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다. 내 나이 33세에 암이라니.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암수술을 받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둬야 했다. 주위에서 걱정할까 내색은 안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고 동시에 내 삶의 목표가 바뀐 때였다. "지금까지 너무 열심히 달려왔으니 잠시 쉬었다가 가도 괜찮아"라며 전화로 위로해준 그 사람의 말이 가슴에 남았다. 어느 정도 체력이 돌아와 그 사람도 볼 겸 태국행 비행기를 탔고 남부지역 끄라비라는 곳으로 향했다. 태국을 여행할 때는 한국인 관광객들과 깃발 들고 다니는 중국인 관광객들로 마치 시장통 같았는데 끄라비에는 유럽 관광객이 대부분이었다. 해변에서 타월만 깔고 선탠을 즐기거나 수영장에서 맥주 한 병 들고서 책을 읽거나. 비키니를 입고 오토바이를 타는 유럽인의 모습에서 자유와 여유가 느껴졌다. 끄라비에서 일정에 쫓기는 이들은 우리 일행뿐인 듯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여운은 오랫동안 남았다.
 당시 방콕에 거주하던 남편은 태국 생활 10년째였고 태국을 너무 좋아해 결혼해서도 태국에서 살고 싶어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끄라비에 신혼살림을 차리자고 했다. 다행히 끄라비에서 자리를 잡은 남편의 지인이 있어 정착에 도움을 받았다. 끄라비에서 구한 신혼집은 오래된 주택이었다. 똑같이 생긴 주택 스무 채가 있는 단지였는데 절반 이상이 유럽인이었다. 끄라비를 `작은 유럽`이라 부르는 이유가 실감 났다. 끄라비 정착 초기에 사기를 당한 뻔한 아찔한 경험을 가진 터라 인생 공부를 했다 여기고 늦더라도 우리만의 여행사를 만들기로 했다.
 끄라비는 건물을 높이 지을 수 없고 해변에 파라솔도 놓을 수 없는 청정 보호구역이다. 그 덕에 여유와 자유, 힐링이 가능한 여행지이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앞서 간 것이었을까. 한국 여행사에서는 이런 힐링 상품은 돈이 되지 않아 인기가 없었다. 당시에는 진이 빠질 정도로 고객을 뺑뺑이 돌린 뒤 쇼핑으로 적자를 메우는 이른바 `마이너스 투어'가 대세였고 우리 역시 살아남기 위해 `타협'을 해야 했다. 그렇게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 동안 우리는 끄라비에서 나름 자리를 잡았다. 리츠칼튼, 라야바디 등 끄라비 최고의 리조트들과 유일하게 다이렉트로 접촉할 수 있는 끄라비 현지 허니문 1등 여행사로 성장했다. 1등 여행사라고 해도, 끄라비는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아 여전히 극소수의 여행객만 찾아올 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끄라비만의 장점과 매력을 제대로 간파한 고향 부산에서 온 여행사 대표를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 여행사가 복사하듯 짜주는 빵틀 같은 단체여행이 아닌 소비자가 직접 여행을 설계·조립하는 `DIY여행' 아이템을 기획했다. 끄라비는 그게 가능한 전 세계 몇 안되는 여행지이다. 획기적인 여행상품이었고 엄청난 기대에 부풀어 있을 즈음 코로나가 터져버렸다, 몇 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는 팬데믹으로 번졌고 세상도, 우리도 멈춰버렸다.
 넋 놓고 하늘만 바라볼 수 없어 집 근처에 한국식 분식집을 차려 장사를 시작했다. 겨우 가게를 유지할 정도의 매출만 올라왔다. 그 사이 우리 주위에 있던 한국인을 포함해 외국인 대부분은 짐을 싸 귀국해 마을이 썰렁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떠나지 않고 손님 없는 빈 가게를 지키는 모습에 끄라비 사람들이 우리 부부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돈 벌러 온 게 아니라 정말 끄라비가 좋아서 왔구나' 하는 진정성이 통해 비로소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코로나 사태 2년, 어쩌다보니 우리가 끄라비에서 유일하게 남은 한국 여행사가 되었다. 2022년, 나는 올해로 끄라비에서 10년째 생활 중이다. 운명은 늘 그렇게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나를 이끌었다.
 근래 우리 부부는 진정한 휴식과 힐링을 원하는 여행자를 위해 2년 전 묵혀둔 그 `DIY 여행상품'을 다듬으며 조금씩 희망을 품고 있다. 끄라비에서 느끼는 이 편안함과 여유가 좋다. 타인을 의식하는 겉모습이 아닌 해방감 속에서 끄라비의 자연과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다.
목록

만족도조사 ㅣ 현재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와 편의성에 만족하셨습니까?

  • 5점(매우만족)
  • 4점(만족)
  • 3점(보통)
  • 2점(불만)
  • 1점(매우불만)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