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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소리
작 성 자 소통감사담당관 등록일 2022/01/03/ 조   회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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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원고와 지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 채택된 원고에 대해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부산남구신문 편집실 ☎607-4077, 1225honey@korea.kr
2021년 오륙도문학상 수상작  대상
못골 촌놈
공기화  

 1950년대에 대연동에 산다고 하면, `아, 못골 촌놈!'이라고 하였다. `못골'이라고 하면, 우선 큰 연못이 있는 농촌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하고, 좀 촌스럽다는 뉘앙스를 남기는 자명이다. `못골 촌놈'이란 중앙동, 광복동, 남포동, 초량 등 부산의 원도심지에 살았던 학생들이 농촌인 대연동의 친구를 놀려 대던 말이었다.
 이 말이 생긴 것은 1940년에 보수동에 있었던 부산기술학교(1924년에 부산공립보습학교로 설립)가 부산공업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어 이듬해 지금의 남구청 자리로 옮겨왔다. 도심지의 풍경과 달리 범일동에서 문현동 동천 위의 나무로 된 `노하다리'를 건너 대연고개를 넘으면 넓은 논과 밭이 있었던 농촌이었다. 이곳은 퇴비를 사용하여 농사를 지어서 도심지와 전혀 다른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해방 후에 6년제인 부산공업중학교가 되었을 때부터 이 학교의 학생들을 `못골 촌놈'이라고 불러 댔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학교가 미 제5공군사령부와 미8군 후방보충부대에 징발당하여 학교와 실습지가 문현동으로 이전했는데도 여전히 이 학교 학생들을 `못골 촌놈'이라고 불렀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1960년대만 해도 부산에 고등학교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학교마다 별명이 있었다. 남학교 중에 좀 건들대고 교복의 단추는 열고, 맘보바지나 나팔바지를 입고,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다니는 불량스럽게 보이는 학생이 많은 학교는 영락없이 `깡패'라고 불렀고, 상업고등학교는 주판을 필수적으로 사용한다고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을 줄여서 `엿장수', `엿쟁이'라고 불렀다.
 당시 부산공업고등학교 외 몇몇 고등학교의 별명을 열거하자면, 경남고등학교는 `똥구두' 또는 `구덕상고', 부산고등학교는 `초량농고', 동래고등학교는 `똥벌', 경남여자고등학교는 `과부', 부산여자고등학교는 `기생', 남성여자고등학교는 `똥포', 동래여자고등학교는 `미나리' 또는 `촌색시'라고 불렀다.
 경남고등학교는 아스팔트 길이 있는 언덕에 위치하여 운동화가 너무 빨리 닳기 때문에 군용 워커를 신는 것을 허용하여 학생들은 그것을 신고 등교하였다. 워커를 왁스로 광을 내어 잘 관리하지 않고, 낡아도 그냥 신고 다녀 허옇게 낡아 빠진 구두를 `똥구두'라고 하였다. 1950년대에 똥구두를 신은 경남고등학교 학생들이 서울상대에 많이 진학했다고 하여 `구덕상고'라고 하였다.
 부산고등학교 학생 중에 울산, 기장, 양산, 밀양 등 동부 경남의 농촌의 학생들이 많이 진학하여 다니고 있었고,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진학했던 학생들이 많다고 하여 그러한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시골의 학생이 많아 촌스러울 것 같으나, 소위 구레빠라고 하는 고급 옷감으로 교복을 입은 귀공자다운 학생들이 많았으니 `초량농고'라는 별명은 걸맞지 않은 것 같다.
 동래고등학교의 똥벌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근면한 인재를 만드는 학교를 뜻하는 `일벌'을 모델로 한 모표를 모자에 달았다. 1950∼60년대 당시 학생들은 짓궂었다. 허점만 있으면, 남의 학교를 비하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다른 학교 학생들은 동래고등학교 학생들을 `일벌'이라 않고 짓궂게 `똥벌'이라고 부르며 놀려 댔다.
 경남여자고등학교 학생을 `과부'라고 부른 것은 순전히 남학생의 시기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학생들은 부산에서 우수한 여학생들이 진학했던 학교였으니 똑똑했던 여학생이 시집가면 팔자가 셀 것이라고 어림짐작했을 것이다. 이를 비하하고 싶었던 남학생들은 "그 학교 졸업생들은 기가 세 과부가 많다"라는 말을 덧입혔는데,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그 학교 출신들은 좋은 데 시집가서 다들 잘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부산여자고등학교 학생을 `기생'이라고 하는 뜻은 경남여자고등학교 못지않던 학교였다. 고위층 공무원이나 법원 관계자와 사업가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어서 부유한 가정이 많았다. 예쁘고 총명한 학생이라는 뜻으로 기생이라고 부른 것은 시샘치곤 좀 지나친 별명인 듯하다. 그 학교 학생들은 베로 만든 가방을 들고 다녔는데 참 얌전하게 보였다. 별명처럼 참하고 예쁜 규수가 많이 배출하였을 것이다. 그 학교 출신 배우 고은아 씨처럼 말이다.
 1953년 한국전쟁 막바지 판문점에서 휴전회담 조정, 결정단계에 있었다. 이때 전국의 학생들은 휴전협정에 반대하여 지금의 시민공원이 된 하얄리아부대의 앞이나 지금의 서구청 자리의 대정공원에서 궐기대회를 열었다. 당시는 중학교 이상되는 학교마다 학도호국단이 조직되어 학생회장을 운영위원장이라고 했다. 지금 학교의 시위와 마찬가지로 학교 대표로 돌아가면서 시위에 대한 소견을 발표하였다.
 남성여자고등학교의 별명에 별난 일화가 있었다. 궐기대회 중에 남성여고 운영위원장이 열변을 토하던 도중 "우리 동포여!"의 발음이 너무 강하여 청중들에게 "우리 똥포여!"라고 들렸던 모양이다. 이후에 `똥포'라는 별명이 나왔다고 한다. 사실의 여부는 잘 알 수가 없으나, 예쁘고 활달한 학생이 많았던 남성여자고등학교를 시기하여 만든 별명임을 두말하면 잔소리다.
 부산진일신여학교의 고등보통학교(중등학교)가 1925년에 동래로 이전하여 동래일신여학교라고 하였다. 해방 후에 동래여자고등학교가 되었다. 동래지역에 미나리밭이 많아 동래여고 학생들을 `촌색시'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리고 미나리 농사를 많이 지었던 기장, 정관, 양산, 울산 등 농촌 지역에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던 동래여고 출신들이여, `촌색시'라 들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지어다. 이제 근면하고 잘살고 있는 이 학교 출신들을 부러워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학교마다 이러한 별호가 지어진 것도 벌써 70년이나 된다. 한국전쟁 전후에 만들어진 이러한 별호는 학교마다 특징도 있으나 상대의 학교를 놀리기도 했던 용어여서 짓궂고 심술궂은 개구쟁이의 재치가 보인다.
 1950, 60년대만 하더라도 부산이나 서울도 도심의 풍경은 지금과 전혀 다르다. 도심에도 밭이 있었고 우마차가 지나다녔을 정도였다. 부산의 도심지에도 2층 이상인 집은 몇 채 되지도 않았으니 지금의 농촌 지역보다 더 촌스러웠다.
 농촌이었던 못골에서 태어난 나는 아직도 못골에 살고 있어 평생 촌놈 티를 벗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부산공업고등학교 출신인 형들이 들었던 `못골 촌놈'이 아주 친근하게 들리는 건, 못골이 나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본상
코스모스
염계자

들녘에 서면
애써 말하지 않아도
제 몸을 흔들어
가을날에 수화를 한다.
온갖 색상으로 핀 언어들이
밀폐된 공간을 일으켜 세운다.
걸망 사이로 춤을 추며
바람은 그리움을 몰고 온다.
뿌리까지 물든
푸른 멍을 여린 날개에 밀어 넣고
손짓만 남겨 놓았다.
날기 위한 꿈들을 휘젓지 못하고
내 안에서 죽어 가는 목숨들이
발끝을 세워 굴절된 기억을 풀어낸다.
뒤돌아보면
서걱거리며 우는 갈바람
너는 가녀린 허리를 흔들어 댄다.


작가상
호수에 담긴 계절
김옥희

알몸으로 겨울을 견뎌 낸 가지에
햇살을 퍼 주고 물도 먹여
초록 옷 입혀 자태를 뽐내게 했다

풍요로운 여름에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과
무성한 잎들을 가진 나무들
모두가 호수에 비춰질 때
구름마저 물 위에서 여가를 즐긴다

물결 위를 스치는 시간은
단풍나무를 그냥 두지 않는다
아름다운 가을을 잎새에 치장하여
추운 겨울이 오기 전
바람에 실어 호수로 흐르게 한다

호수는 단풍잎을 투영시켜
석양의 영롱함과 이별의 아픔도
계절에다 채색한다

호숫가에 서면 투명하게 스며드는 가을
나는
발자국마다 떨어지는 낙엽을 피해 가며
시집간 딸의 행복을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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