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명

home 남구이야기 > 지명
  • facebook
  • twitter
  • twitter

디딜밖과 디딜방아| 용당동

용당 본동의 초입 지점, 광산 김씨네 산소가 있었던 동뫼 주면을 〈디딜밖〉이라 했다. 지금은 동뫼가 없어져〈디딜밖〉의 의치를 정확히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의 용당 새마을 금고와 25번 버스 종점의 동쪽 일대라고 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이 일대가 언제부터 〈디딜밖〉으로 불렸는지 정확한 내력을 알 수는 없지만 마을이 생길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다.


〈디딜밖〉의 유래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미개간지라는 의미의 〈디딜밖〉이다. 방치되어 있는 황무지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 잡초가 우거지고, 밤이 되면 도깨비불이 번쩍이는 곳을 〈디딜밖〉이라 부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인가가 들어서고 기름진 옥답이 있는 지역은 〈디딜안〉이라 부른 것으로 부는 것이다. 즉, 인가가 들어서고 기름진 옥답이 있는 지역은〈디딜안〉이되고 〈디딜안〉 의 반대 개념이 〈디딜밖〉이 된다.


둘째는 〈디딜방아〉와 연관시켜 보는 견해이다. 용당의 디ELF방아는 윗마을 새미 집에 있었다고 한다. 디딜방아는 울안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디딜밖〉이란 〈디딜방아가 있는 곳의 바깥〉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용당에서 사용한 방아는 디딜방아에서 연자방아로 발전하였으며 정미소로 자리를 내주었다 윗마을의 연자매는 해방 무렵까지 제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으며 아랫마을의 방아는 1960년 중반까지 방아 터에 있었는데 모래 속에 묻혔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1929년 전기 들어오면서 정미소가 생겼다. 김갑동(金甲同 : 김치덕 씨 부친)씨가 살림집을 겸한 30여 평의 목조 건물에 정미소를 차린 것이 최초였다. 용당에서 정미소가 존속한 기간은 30여 년이었고 60년 이후 동명목재가 합판 공장을 세우면서 정미소는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경작지가 공장으로 바뀌면서 정미소는 일거리를 잃고 힘들어 하다가 1970년 초에 문을 닫았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맨위로가기

목록

만족도조사 ㅣ 현재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와 편의성에 만족하셨습니까?

  • 5점(매우만족)
  • 4점(만족)
  • 3점(보통)
  • 2점(불만)
  • 1점(매우불만)
등록하기
  • 담당부서 : 문화예술과 문화예술팀  
  • 담당자 : 최병욱
  • 전화번호 : 051-607-4063
open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