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보기산(황령산)| 대연동
반보기산 - 부산 아낙의 만남의 장소
황령산은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거칠고 보잘 것 없는 산이라는 ‘횡강산’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반보기산은 황령산의 옛 이름으로 현재까지 그 유래가 분명하게 전해지고 있다. 옛날 용주골은 아낙들이 시집을 갔다가 친정에 와서 반나절 동안만 만났다가 헤어지는(일명 용주골 씨골계) 산이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시집을 가면 친정 식구들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당시 대연동 사람들은 용호동이나 기장 쪽의 동면 사람들과 혼인을 주로 하였는데 시집을 가면 최소한 일년은 지나야 친정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친정이 가까운 경우에는 나물 캐러 가는 양으로 집을 나서서 산으로 올라가서 멀리 고향을 보기도하며 때로는 친정 식구들과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 확대되어 가족들과 만나는 장소로써 이용하던 것이 계기가 되어 매년 4월 초파일 황령산에서 친정식구들과 만나서 반나절동안 준비해 온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다가 헤어졌다. 용소 경로당 할머니들이 말에 의하면 그때는 개금, 기장 등 먼 곳에서도 식구들을 만나보기 위해서 서로 먹을 것을 조금씩 챙겨가지고 밤새도록 걸어와 그 곳에서 만났었다고 한다. 얼굴을 보면 반가워서 부둥켜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다가 해거름에 헤어질 때에는 가다가 뒤돌아서서 울고 또 가다가 뒤돌아서서 울며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 도로가 뚫리면서 차도 들어오고 전화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그런 옛스러운 정취가 서서히 없어졌다. 할머니들께서는 “그 때는 잔치집 가듯이 반갑고 흥겨운 놀이마당이었으며 이런 날이면 그 곳에 물건 파는 사람들도 많았고 풍물도 치면서 놀았고 할머니도 자주 가서 봤는데...”라고 하셨다. 이때 옆에 계시던 김온룡(1912년생) 옹께서 그 때 풍물 치고 놀 때 했던 노래 중에서
“성아 성아 올케 성아/ 시집살이 어떻더노./
시집살이 말도마라/ 모시적삼 속적삼이/ 눈물 젖어 다 썩었다.″
라는 노랫말을 하셨다. 이 말을 듣고 보니 한 번 시집가면 부모가 돌아가셔야 친정에 갈 수 있었던 옛날이 상기되었다. 그리고 여인들의 시집살이가 얼마나 힘들고 참기 어려운 삶이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노랫말 대목이다. 그 당시를 회상하시듯 용소경로당 할머니1) 들의 눈시울이 붉어지셨다. 이 풍습은 50여 년 전까지 존속되다가 현대화와 더불어 없어졌다.
1)용소경로당 할머니
김순분(1916년 생), 최진득(1921년 생), 황북술(1919년 생), 김금출(1919년 생), 최두남(1909년 생), 송갑순(1914년 생), 정정남(1914년 생)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