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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농막마을| 문현동

웃농막 마을 웃농막 마을은 문현 2동에 있는 마을이다. 이 곳은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될 때까지도 주택이 거의 없는 농지였는데 1950년 6ㆍ25동란 이후 피난민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차츰 인구가 증가하여 주택가로 변하였다.1) 이곳에는 오랜 옛날부터 당산 제당이 있었다. 1993년부터 부산시의 지원을 받아 문현2동 613의 80번지에 청기와 지붕의 2평 규모의 제당을 다시 복원하였다. 그리고 1994년 5월1일 ‘당산복원환단 당산제’를 올리게 되었다. 이날 건립된 제당의 비문에는 웃농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즉 “1845년을 전후하여 차츰 부락의 윤곽이 형성되어 ‘웃농막’이라 호칭이 되던 시기부터 있었던 향리의 토속적 수호신을 모신 당산을 일제가 한민족 문화말살정책과 1925년 좌천동 해변 일대의 매축을 구실로 동산 토석을 채취하던 과정에서 당산이 헐리게 되어(이후 생략)”라고 하였다. 이 비문의 내용을 보면 웃농막 마을은 지금부터 약 150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그 당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당산이 있었던 곳이라고 생각된다.

1) 남촌지 p214 1995.1.5 남촌지 발간추진위원회 


“洞祭堂의 來歷 

1845年 前後하여 차츰 마을의 輪廓이 형성되어 웃農幕이라 呼稱된 時期로부터 있어 왔던 鄕吏의 土俗的 守護神을 모신 堂山을 日帝가 韓民族 文化抹殺定策과, 1925년 左川洞 海邊一帶의 埋築을 口實로 堂山 土石을 採取하던 過程에서 堂山이 헐리게 되어 不得已 本洞 620番地에 遷壇 당하였다가 1969年 門現 老人亭 舍屋을 建築하고 2層 屋上에 祭壇을 安置하였었다.


回顧컨대 8.15解放과 6.25戰爭 등의 世態 混亂期를 거치면서 洞民의 生活相에 따른 移住集散이 빈번했던 時期의 不可避로 70年동안 門現老人亭 몇몇 사람의 享祀로 命脈만 이어오던 것을 이제 洞民의 總意를 모아 洞資産이 구 門現老人亭舍屋의 賃貸先貸金과 뜻있는 洞民의 誠金으로 及其也 原位置에 復元建立하여 現代的 感覺에 適應하는 洞祭堂이라 懸板을 걸고 첫 大洞祭에 臨하게 된 것을 契機로 永遠한 洞民의 安寧과 和合을 祝願하는 傳統民俗行使의 次元으로 昇華하는 洞祭(堂山祭)를 封祀코자 全洞民의 念願을 담아 그 뜻을 이에 刻銘해 둔다. 


西紀 1994年 5月 1日 建立” 


다음은 위의 동제당 건립 비석의 원문을 한글로 옮겨 적은 것이다.


“동제당의 내력 


1845年 전후하여 차츰 마을의 윤곽이 형성되어 웃농막이라 호칭된 시기로부터 있어 왔던 향리의 토속적 수호신을 모신 당산을 일제가 한민족 문화말살정책과 , 1925년 좌천동 해변일대의 매축을 구실로 당산 토석을 채취하던 과정에서 당산이 헐리게 되어 부득이 본동 620번지에 천단 당하였다가 1969年 문현노인정 사옥을 건축하고 2층 옥상에 제단을 안치하였었다. 회고컨대 8ㆍ15해방과 6ㆍ25전쟁 등의 세태 혼란기를 거치면서 동민의 생활상에 따른 이주집산이 빈번했던 시기의 불가피로 70년 동안 문현노인정 몇몇 사람의 향사로 명맥만 이어오던 것을 이제 동민의 총의를 모아 동자산이 구 문현노인정사옥의 임대선대금과 뜻있는 동민의 성금으로 급기야 원위치에 복원 건립하여 현대적 감각에 적응하는 동제당이라 현판을 걸고 첫 대동제에 임하게 된 것을 계기로 영원한 동민의 안녕과 화합을 축원하는 전통민속행사의 차원으로 승화하는 동제(당산제)를 봉사코자 전동민의 염원을 담아 그 뜻을 이에 각명해 둔다. 


서기 1994년 5월 1일 건립”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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