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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뱃머리 (적기뱃머리)| 우암동

우암 뱃머리 (적기뱃머리)

현재 부산 은행 앞에서 큰 도로 맞은편까지를 우암 뱃머리라 한다.


우암천을 흐르는 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배가 정박하는 포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 곳을 ‘우암포 뱃머리’라 불렀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영도 앞에서 우암반도 (일명 적기)1)로 통선(경로당 할머니들은 뻘배라고 말함)이 다니고 있었고 옛날 외부 사람들은 이곳을 ‘적기 뱃머리’리고 불렀다. 이 통선의 규모는 30명 정도 탑승하는 배로서 3~7척이 운항하였고, 60년대까지 뱃삯은 10전이었다고 한다. 이 뱃머리 근처에는 모래도 좋고 물이 깨끗하여 해수욕도 했는데, 수영을 하던 어느 부잣집 딸이 배의 스크류에 감겨 발목을 전단한 일이 있은 후 손님이 줄어들고 결국 통선 운항은 사양길에 들었다고 한다.


부산항 매축 뒤 토끼풀이 자라던 공터는 군수창고로 쓰이다가 성창기업이 들어와서 합판공장을 가동하였다. 이 공장은 외화를 벌어들여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부산 지역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으나, 지금은 이웃 용당의 동명목재와 함께 사라졌다. 도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지만 육지 쪽으로 도로가 더 넓어졌다.


김주복 씨는 우암 앞바다에 모시조개가 많았지만 일제 때는 군인(보급창)이 있어서 (현재 고려 콘테이너 자리) 사람들이 얼씬도 못했다. 해방 후 가보니 모시조개가 무진장 깔려 있었다고 한다.


또 김주복 씨는 “일제 때 검역소에서 검역을 거친 소들을 일본으로 싣고 갈 때 이곳에서 기중기로 소를 달아 올려서 200톤~300톤급 배에 실어 갔다. 소의 사료 회사인 흥업축산회사가 관리하면서 검역을 마친 소들을 시모노세키로 운반하여 갔다.”고 한다.


임병렬 씨는 소막과 소막 사이에는 바다 쪽으로 향한 5-6m통로가 두 군데 있었고, 바닥에는 소들이 편리하게 잘 지나가도록 정교하게 돌을 깔아 놓았었다고 한다. 이 두 통로는 현재의 부산 은행 앞에서 한 통로로 합쳐져서 바다 쪽으로 통해 있었다. 이 통로는 폭 7~8m 도로의 약 2m 밑에 있는 통로로 이어지고 철길을 지나 선착장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이 통로는 일본인들이 소를 소막에서 선착장까지 자연스럽게 몰고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소를 쉽게 선착장에 접안 된 배에 실었을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이 선착장은 해방 후 1962년까지 우암동에서 시내로 가는 도선장으로 이용되었으며, 한때는 다대포까지도 운항하였으나 이용객이 적어져서 서서히 없어졌다고 한다. 옛 모습의 선착장은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라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1) 김주복씨는 우암동 뱃머리를 일본인들이 적기 뱃머리 또는 적기 반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강한 어조로 반론을 제기하였다. 즉, 적기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일제시대 때 “이곳의 흙 색깔이 붉게 보인다고 하여 붉을 적(赤)을 사용하여 적기라고 불렀다. 그래서 우리의 고유 지명은 ‘적기 뱃머리’가 아니라 ‘우암동 뱃머리’라야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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