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골 산신제| 용호동
어느 동이든지 대체적으로 그 동(洞)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당(堂)이 있기 마련이다. 용호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마다 음력 9월 9일이 되면, 장자봉의 제석골(약수터 옆)에 있는 당할아버지와 마을에 있는 당산의 당할머니를 모시는 제를 올리는데 이를 제석골 산신제라고 부른다.
먼저 제석골에 있는 당할아버지를 새벽에 모신 후, 산에서 내려와 9시 30분이나 10시 쯤 되면 당할머니를 모신다고 한다.
옛날에는 두 곳의 제사를 따로 따로 모셨지만 그 준비가 두 달 전부터 시작되는 등 번거로움 때문에 왕윤호(1925년 생)씨가 동장으로 있던 시절에 한꺼번에 모시도록 하였다고 한다. 비록 하루에 당할아버지와 당할머니를 모두 모시지만 제상에 차리는 음식은 따로 마련한다고 한다. 제사에 쓰는 음식은 명태와 술, 과일 등이었으며 용호동 여성 향우회에서 제수거리를 준비한다고 용호동 여성 향우회 김구자 회장은 전한다.
윤경윤(1927년 생)씨와 김윤만(1916년 생) 씨의 진술에 따르면 이제석골에서 당할아버지를 모시는데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져 온다고 한다.
김녕 김씨 김윤만 씨의 선조께서는 다대포 첨사 윤흥신 장군과 같이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하신 분으로 1549년 당시 가옥이 세 채밖에 없는 분포(지금의 용호동)에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 과객이 너무 많이 들어와 부인네들의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이 대목에서 어떤 할아버지는 그 당시 파평 윤씨가 세도를 부리며 살았고 이 일은 윤씨 집안에서 일어났다고 이야기했다) 그 당시는 세 끼 끼니를 준비할 때 마다 방아를 찧어 준비를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부인네들이 방아를 찧으며,
“이 방아를 언제나 면하겠노?” 라고 탄식을 하고 있었을 때 “그거 간단하다.”라고 뒤에서 대답하는 스님이 있었다는 것이다.
“올라 오셔서 의논해봅시다.”하고 불러들였는데 그 스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요 앞 장자산에 올라가 보면 머리는 대마도를 바라보고 꼬리는 용호동 쪽으로 내리고 있는 호랑 바위(소같이 생긴 바위라고도 함)라는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만 깨뜨리면 되오.” 이 말을 들은 아낙은 아들 삼 형제를 불러 바위를 깨뜨리도록 시켰다. 세 아들은 정과 망치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 대마도 쪽을 보고 있는 머리 부분의 바위를 깨뜨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 이유도 없이 세 아들이 죽었다. 크게 잘못한 것을 깨달은 김씨는 깨어진 바윗돌을 세 개 주워와 모셔놓고 일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돌은 목욕을 시켜 한지로 싸고 창호지로 승려들이 쓰는 것과 비슷한 고깔을 만들어 씌운 후 빨강 색깔의 천으로 방석을 만들어 그 돌을 받쳐 놓았는데 1년에 한 번씩 한지를 바꾼다. 모셔진 돌의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고, 보통 사람들의 주먹만하다고 말하지만 제사를 모시는 날 가서 직접 본 결과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제법 큰 돌들이었다.
이 제석골 사당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해방 후에 제석골 근처에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무속에 무지한 미군들이 사당이 어떠한 곳인지도 모르고, 사당의 벽을 향하여 집중사격 연습을 하여 당집의 벽을 많이 상하게 하였다. 그 부대가 일사후퇴 때 환도하는 중에 몰살을 당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제당 뒤에는 나무가 무척 많았는데 먹고살기가 어렵던 시절이라 사람들은 그곳의 나무를 잘라다 팔기도 했다. 외지에서 온 두사람이 나무를 베어 팔았다가 거의 죽을 뻔한 일이 있었는데 역시 굿을 하고 당할아버지께 빌어서 다시 살았다’고 한다.
또 제당 위에도 농사짓는 밭이 있었는데, ‘똥장군을 지고 제당 앞을 지나기가 죄스러워 거름을 하지 않은 곳은 거름을 했을 때와 똑같이 좋은 수확을 하였으나, 모르고 똥장군을 지고 올라간 사람은 지게를 질 수 없게 쓰러졌다’고 전한다.
또 구월동제 이야기를 전해 준 윤경윤 씨의 부친과 8촌 아저씨도 당할머니에게 잘못하여 다음과 같이 받았다고 한다. 그분들이 살던 당시에는 종이가 무척 귀했다. ‘그 때 두 사람은 당할아버지를 모신 당 근처에 올라가다가 음식을 차려놓은 제상을 보고, 제상판에 깔려 있는 창호지를 꺼내어 연을 만들어 날리며 놀았다고 한다. 그 후에 두 사람은 다리가 오그라 붙어 크게 고생을 하였는데, 당할아버지에게 크게 잘못을 빌고 굿을 한 뒤에서 비로소 다시 걸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라호 태풍이 불어왔을 때에도 어부들이 많았던 용호동은 한 사람의 인명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용호동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제석골 산신제를 잘지낸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현재 당집은 빨간 벽돌로 개축을 하여 잘 보존하고 있으며, 당 안에는 세 개의 돌과 함께 위패가 있는데, 「삼존불신지위(三尊佛神之位)」라고 쓰여있다.
제사에 쓸 음식은 깨끗한 할머니들 중 서너 명이 준비를 하며, 제관은 유지들이 한복을 입고 지낸다. 제사의 형식이 옛날에는 복잡하였으나 요즈음은 일반 제사와 비슷하게 바뀌었고 마을의 안녕과 바 평안 그리고 풍년을 기원하는 내용의 축문도 써서 읽는데, 전숙남 할아버지는 여러 번 축문을 직접 써서 읽었다고 하며, 그 할아버지로부터 제사 때 읽었던 축문을 구할 수 있었다.
제사를 잘못 지내면 재앙이 온다고 믿기에 제사를 맡으려고 하는 사람이 잘 나서지 않아 현재는 타지방에서 들어온 사람이 아닌 용호 본동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 용호 향우회(40세에서 60세 사이의 사람들이며, 용호동에서 30년 이상을 살아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자 향우회는 만들어진 6년이 넘으나 여자 향우회는 1년반 정도 되었다고 함)에서 맡아 제사를 모시고 있다.
여성 향우회 회장인 김구자씨의 말에 의하면 제사를 잘못 지냈거나 부정한 사람이 제사를 맡았을 때에는 산신이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이에 놀라서 찬물로 목욕제계하고 나서 제를 다시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벌을 받고 죽은 사람도 생기자 모두들 겁이 나서 제사를 지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몇 년을 제사 지내지 못하고 있다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9월 9일에 다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 세상이 그렇게 복잡하니 더러 용서도 좀 해주고 못 본 척도 좀 해달라고 용서를 크게 빌었다고 한다. 그 뒤부터는 매년 제관은 용호 1동의 동장이나 덕망이 있는 용호동 유지분들이 맡고, 부정하지 않은 남자 중에서 제주를 뽑아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부정하지 않은 4명의 남자들만이 제사에 참석하도록 하고 있고 음식은 할머니 중 깨끗한 사람이 아침 일찍 함께 산에 올라가 장만한 것으로 제상을 차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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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